
서울시 은평구 북한산 밑에 진관사가 있다. 절에서 내려오다 보면 몇 채의 관문이 있다. 한 액자에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무슨 뜻일까. 오래전에 독일의 종교학자 하인리히 듀몰린 교수가 한국에 왔을 때 나누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석가님이 한국에 오시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저렇게 많은 사찰을 짓기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신체적인, 정신적인 자비를 베풀지. 어디에 가나 내 불상이 있는데 민망스러워 볼 수가 없다. 불필요한 불자들의 모습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일본 불교는 철학이라도 남겼는데 한국 불교는 사상적 업적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얘기를 했다.
진관사의 편액도 그런 의미의 종교는 아니라는 선각자의 경고였는가. 불교는 이제라도 그런 공간 위주의 종교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세계적으로 교인·교회 줄지만
진리로서 기독교 신앙은 지속
과거 답습 탈피해 세계와 공존
역사 이끄는 교훈이자 약속
부산 피란 때도 장로회 교권 다툼

기독교는 어떠한가. 비슷한 시기에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 영락교회가 한강 남쪽에 동양 제일가는 예배당을 지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기존 공간이 너무 협소해졌기 때문이었다. 생각 있는 젊은 신도들이 찬성하지 않았다. 당회 원로 한 분인 최창근 장로가 교계 몇 사람의 여론을 청취하기로 했다. 대학교수로 있던 지명관 장로가 “정신이 나갔느냐”라고 반대했다. 기독교는 그런 건축물과 영락교회의 명성을 원하지 않는다는 항의였다. 나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뜻은 어떤 장소에 들어서든 아시아를 대표하는 성전이 아니다”라고 했다.
과거 기억이 떠올랐다. 6·25 전쟁, 부산 피란 때였다. 부산 중앙교회에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장로회가 기독교와 예수교로 분리되는 총회를 방청했다. 대한민국이 존폐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 교권과 교리를 갖고 싸우는 것을 보고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는 말씀에 따르기로 한 것이 오늘의 내가 되었다.
나는 1972년 여름에 두 번째 세계여행을 했다. 기독교와 세계종교에 관한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캐나다를 거쳐 덴마크를 방문했다. 기독교 사상계에 가장 큰 영향을 남겨준 키르케고르에 관심이 많았을 때였다. 키르케고르가 다녔던 코펜하겐의 대표 교회당을 찾았다. 주일 예배였는데 아래 위층이 텅 비어 있었다. 500~600명이 모이던 예배당에 30~40명의 신도가 모였을 뿐이었다. 3~4명의 목회자가 예배당 입구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때나 부활절을 비롯한 큰 행사가 있을 때는 200~300명이 모인다는 설명이었다.
다음 주일은 런던에서 보냈다. 주택가의 호텔이고 토요일이어서 주일 예배를 위해 교회 위치를 미리 찾아보기로 했다. 찾아간 교회 게시판에는 주일 정식예배가 저녁 시간이고 낮 예배가 없었다.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모두 합해서 40~50명이 모였는데, 그 예배가 마지막이고 다음 주일부터는 가까이 있는 교회와 함께 모인다는 광고였다. 부목사에게 물어보았더니 교인 수가 너무 적어져 두 교회가 연합하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는 교회 수가 많이 축소될 것 같다는 우려였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교회는 국가를 상징하는 큰 성전인데 지금은 예배 장소를 도서관이나 특수한 기관들이 활용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기독교 지도력 철학보다 비중 커
비슷한 현상은 천주교에서도 볼 수 있었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도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은 200명 미만인데 성당 관람객은 20~30배가 되는 현상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미사에 참석했을 때도 비슷했다. 십자가의 머리 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에서 미사가 열렸는데 많아야 300명 정도였다. 대부분을 세계 각 곳에서 순례로 참석한 신부·수녀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성전 관람객은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이 주관 참석하는 특별행사 때는 성당 밖 광장을 인파가 메우곤 한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교황청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관광객은 언제나 만원이다.
일본에 들렀을 때도 비슷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총체적으로 절반이 줄었고 긴자(銀座)의 큰 교회에는 예배실의 5분의 1쯤이 모였다. 교육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교회당이 비어가는 현상이다. 그러나 교인 수와 교회당이 줄었다고 해서 기독교 정신이 약화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서적과 사상은 여전히 확산되고 있다. 사회 여러 면에서 20세기는 철학의 영향보다 신학자들의 지도력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이 미국과 일본의 평가였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 종교 행사와 교회의 공간적 기능은 축소되었으나, 기독교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는 역사적 보편성을 증대시켜 왔다. 기독교 신앙과 인문학이 공존하면서 비(非)이성적, 반(反)이성적인 교리와 비·반 윤리적인 가치가 배제된 것이 원인이다. 교회당은 수가 줄었으나 지성인의 신앙은 지속되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존재하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과, 교리보다는 진리로서의 교훈과 가치가 일반화되었다. 기독교 공동체는 교회를 모체로 출발했으나 교회보다 더 많은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과거의 연장이 아니고 열린 세계와 공존의 질서, 세계역사를 미래로 이끌어 가는 희망의 약속으로 이어져 왔다. 세계정신사 위치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이성과 양심의 의미와 가치를 함유하면서 휴머니즘과 공존해 왔다. 앞으로 주어진 과제는 이성과 양심이 사회적 한계에 도달했을 때 자유와 사랑이 주체가 되는 휴머니즘으로 이끌어 가고, 휴머니즘의 한계에 봉착했을 때 희망을 약속해 주는 것이다.
기독교의 그리스도 정신은 종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회와 역사를 영구히 이끌어 갈 희망의 교훈과 약속인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