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솥을 닦는다, 고향의 온기 나누려고

2025-01-29

설이면 벼를 찧어달라 연통 넣고 만두 빚고 차례 음식 준비하던 엄마…그땐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제는 내가 명절이면 모이는 동료들을 생각하며 기꺼이 떡국을 끓인다

명절이 가까워지자 동료들로부터 이번 명절에는 무슨 음식을 준비해오면 되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배달 음식을 시키면 되니 서로 부담 없이 가볍게 만나 한 끼 먹고 수다나 실컷 떨자 말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 되어 명절이면 으레 모이기 시작했다. 말로는 싫다 귀찮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명절 준비를 하고 있다. 창고에서 곰솥을 꺼내 놓고 시장을 봐 냉장고를 채운다. 이런 내 행동에 실없이 웃음이 났다.

어린 시절 외가 동네에 더부살이하듯 살던 때는 명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의 명절 준비는 보름 전부터 시작된다. 추석에는 솔잎을 따다 말리는 게 명절 시작이고 설날이 다가오면 지난해 농사지어 방앗간에 맡겨 놨던 벼를 방아 찧어 달라는 연통을 넣는 것이 첫 단추였다. 우리집은 장독대 밑에 지하실이 있었는데 지하실 안에는 가을에 담근 김장김치로 가득했다.

나는 수백 포기의 김장김치도 헛간에 쌓인 쌀자루도 모두 꼴 보기 싫었다. 엄마가 펴질 새 없는 허리 때문에 끙끙 앓는 소리를 낼 적마다 눈을 흘기며 소리 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엄마는 명절에 들를 자신의 형제들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설날을 사흘 남기고 엄마가 만두소를 버무리며 연신 나를 불러 댔다. 나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분명 축사에 나가 보라는 심부름을 시킬 것이 뻔했다. 새끼 밴 암소가 곧 몸을 풀 예정이었다. 소는 초산이었고 출산 경험 없는 소는 세밀히 살펴줘야 했다. 여차하면 사람이 출산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여러 차례 나를 불러도 내가 대답조차 하지 않자 결국 엄마가 폭발했다. 우당탕탕 그릇 내던지는 소리가 내 등을 내려쳤다. 나는 긴 한숨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손이 날랜 엄마는 벌써 만두를 쟁반 하나 가득 빚어 놨다.

엄마가 내게 한바탕 화풀이를 해댔다. 나도 듣고만 있지 않았다. 말대꾸를 하다가 엄마의 매서운 표정을 보고 얼른 점퍼를 주워 입고 축사로 나갔다. 하늘은 하루 종일 회색빛이었다. 손끝이 고드름처럼 굳어갔다. 축사를 한 바퀴 둘러봤다. 소들도 매서운 한파에 몸을 웅크리고 흰 입김을 푸푸 뿜어내고 있었다. 출산을 앞둔 암소가 꽝꽝 언 물통을 혀로 핥았다. 나는 고무장갑을 찾아 끼고 얼음덩어리가 된 물통의 얼음을 깨고 뜨거운 물을 양동이로 받아다 물통마다 채웠다. 소들은 갈증을 참고 있었는지 금세 물통을 비워 댔다. 목을 축인 소들이 자리에 누워 되새김질했다. 출산을 앞둔 소만 엉거주춤 서서 제 몸을 혀로 핥아 댔다. 몸이 불편해서인지 잠시 앉았다가도 힘겹게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나는 바닥에 건초를 넉넉히 깔아줬다. 내가 축사를 돌보는 새 엄마는 만두를 한솥 쪄서 김을 날리고 또 가스 불에 찜솥을 올렸다.

“이왕 낳을 거면 명절 전에 빨리 나와야 쓰겄는디.”

엄마의 걱정이 식어가는 흰 만두 위에 내려앉았다. 최악은 항상 들어맞기 마련이다.

암소는 명절 전날 점심부터 해산 조짐을 보였다. 나는 축사를 연신 오가며 보초를 섰다. 배가 아픈지 어미 소가 긴 꼬리로 제 배를 툭툭 치더니 벌서듯 꼬리를 하늘로 쳐들었다. 이미 어미가 된 소들이 산통을 시작한 제 식구를 달래듯 ‘밍밍’대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물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고 건초를 깔아 주는 것밖에 없었다. 차례 음식을 하던 엄마가 걱정이 됐는지 앞치마 차림으로 축사를 들여다봤다. 마침 소가 자리를 잡고 눕더니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소가 해산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여러 차례 본 적 있어 신기하거나 놀라운 광경은 아니었다. 엄마도 일하던 것을 정리하고 축사로 나와 소를 지켜봤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양수가 터지지도 분비물이 나오지도 않았다. 되레 산통이 멈췄는지 쳐들었던 꼬리를 내리고 건초를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속았다며 각자 멈췄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

엄마는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만들고 나는 마당을 쓸고 제기를 꺼내다 닦았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괜히 축사를 내다보고 싶어졌다. 금세 들어올 요량으로 점퍼도 걸치지 않고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 흘깃 축사를 들여다보는 데 불안한 신음 소리가 나를 잡아당겼다. 소들이 저들끼리 속닥이듯 ‘밍밍’소리를 냈다. 눈을 뗀 잠깐 사이에 소가 해산을 하고 있었다. 이미 양수는 터져 있었고 조그마한 발굽이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나는 황급히 엄마를 불렀다. 힘을 주는 어미의 입김이 공기 중에 흰 안개를 퍼뜨렸다. 어찌나 힘을 주는지 누런 털이 땀에 젖어 붉게 보였다.

힘을 주던 소가 돌연 이상 행동을 보였다. 안간힘을 쓰고 일어나더니 방금 전까지 해산 중인 것을 잊기라도 했듯 건초를 입에 가득 물고 태연히 씹어 삼켰다. 시간을 지체하다가는 송아지도 어미 소도 위험할 것만 같았다. 양껏 여물을 먹던 소가 다시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되새김질했다. 애타는 쪽은 지켜보는 이들뿐이었다.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켜주자며 나를 이끌고 집으로 들어갔다.

꽁꽁 언 몸을 녹이고 다시 축사로 나가는데 입술에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회색 하늘에서 나풀나풀 흰 눈이 쏟아졌다. 어미 소가 다시 해산을 시작했다. 작은 발굽과 관절이 힘겹게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엄마는 새 면장갑을 들고 전전긍긍했다. 평소라면 어미 소를 도와 송아지를 꺼낼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읽고 목장갑을 낚아채서 손에 꼈다. 엄마는 말리는 척하더니 자기가 신호를 보내면 힘껏 다리를 잡아당기라고 지시했다. 나는 양수로 젖은 미끄러운 두 다리를 힘껏 잡고 준비했다. 어미 소가 힘을 주자 엄마가 내게 당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번 세 번 엄마의 신호에 맞춰 온 힘을 다해 두 다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송아지가 쑥 딸려 나왔다. 양수에 젖은 송아지는 볼품없었다. 엄마가 소독한 가위로 탯줄을 잘랐다. 나는 수건으로 송아지를 닦아줬다.

어미 소는 기진맥진해서는 새끼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경험 없는 어미는 이렇게 새끼를 방치해 새끼가 얼어 죽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린 짐승이 어미를 찾아 ‘메메’소리를 냈다. 보다 못한 내가 송아지를 번쩍 안아 어미 앞으로 옮겨 놨다. 보통의 어미 소는 출산하자마자 제 새끼를 혀로 핥아 주고 분비물을 몽땅 먹어 없앤다. 그건 배울 필요 없는 본능이었다.

새끼가 제 어미를 향해 울어 댔다. 그런데 어미는 도통 새끼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고 흰 입김만 푸푸 뿜어냈다. 엄마가 전선을 연결해 드라이기를 콘센트에 꽂았다. 내가 드라이기를 받아 송아지를 말렸다. 엄마가 연신 내게 미안하다 굽신대며 빨리 음식을 마무리하고 돕겠다 말했다. 어미 소는 끝끝내 제 새끼에게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송아지가 젖을 찾아 다가가면 발길질을 해서 새끼를 쫓아버렸다. 갓 태어난 어린 짐승이 바닥에 쓰러져 야속한 제 어미를 원망하듯 울어댔다.

부랴부랴 일을 마친 엄마가 억지로 젖을 짜서 송아지를 먹였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는지 송아지가 빈 젖병을 계속 빨아 댔다. 나는 화가 나서 어미 소의 한쪽 뒷다리를 밧줄로 묶고 기둥에 밧줄을 매달았다. 그러고는 송아지를 끌어다가 젖을 먹였다. 세 다리로만 서 있던 어미는 꼼짝도 못했다. 어미 소는 끝끝내 제 자식을 외면했다. 송아지는 분유를 먹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제 어미가 팔려 가는 날도 무심히 사료를 먹고 다른 소들 틈에서 뛰어놀았다. 나는 피가 당긴다는 말은 헛소리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는 고향을 잃었다. 명절은 그 어느 때보다 쓸쓸하고 외로운 날이었다. 그러다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 동료들이 내 집에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상스럽게도 혈연으로 묶인 가족보다 같은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동료들이 편하고 의지가 된다.

떡국을 끓일 곰솥을 닦다가 나는 그 시절 엄마의 마음을 이해했다. 엄마도 나처럼 누군가의 고향이 돼주고 싶었으리라. 쌓인 노고와 희생은 반가운 이들과 재회하는 순간 모두 잊고 말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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