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 따라, 왕 구명 위해 3만㎞…중국땅이 좁았다

2025-01-30

근대 이전 최장거리 여행자 이제현

설날을 구정(舊正)이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정부가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고 하고 3일까지 연휴로 지정해서 공휴일도 아닌 음력 설을 고사시키려고 했다. 그때 이중과세(二重過歲) 금지란 말도 나왔다. 해를 두 번 보내지 말라는, 즉 설을 두 번 쇠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국민들의 음력 설 사랑을 막지 못했다. 결국 구정이 ‘민속의 날’이란 어정쩡한 이름으로 공휴일이 되더니 1989년부터는 ‘설날’ 이름을 되찾고 사흘 연휴가 되었다. 대신 신정 연휴는 점차 없어져 신·구정 싸움은 후자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래도 어쩌겠나, 실제 생활은 양력에 맞춰 하는 것을. 1월 1일에 새해 인사를 다 한 데다 차례 모시는 정성도 옛날만 못하니, 설날에는 딱히 할 일이 없다. 게다가 올해는 정부의 깜짝 선심으로 긴 휴가를 누리게 되었고, 그 덕에 130만 명 이상이 해외여행에 나섰다. 옛날에도 해외여행을 했을까?

원격통치 충선왕, 고려 인재 추천

아미산·보타산 불교 성지 다녀와

충선왕 유배 가자 2000㎞ 달려가

여행 가는 곳마다 기행시 남겨

명·청은 조선인의 출입국 엄격

소수만 여행 국제정세 둔해져

대륙의 모퉁이 해외여행 쉽지 않아

우리나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옛날부터 동서로, 남북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빈번히 거쳐 가는 곳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비교적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대신 바깥세상에 호기심을 갖기 어려웠다. 그런 중에도 이역만리까지 진출한 사람이 없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 장군은 당나라 군대를 이끌고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가서 전투를 벌였고, 신라 승려 혜초는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다녀와서 『왕오천축국전』을 지었다. 하지만 이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여행이라고 하기 어렵다. 여행은 귀환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주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 역사에서 조선시대까지 통틀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고려 후기에 살았던 이제현이 아니었을까? 당시는 몽골제국이 세워지면서 국경이 사라졌고, 고려와 몽골 사이 국경은 매우 낮아져서 수많은 사람이 왕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이제현처럼 멀리, 여러 곳을 여행하지는 않았다.

익재 이제현(1287~1367)은 고려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관료이다. 그는 젊은 시절 충선왕의 지우를 받아 왕성하게 활동했는데, 해외여행도 충선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충선왕은 고려와 몽골의 왕실 혼인에 따라 쿠빌라이 칸의 딸 쿠툴룩켈미쉬 공주와 충렬왕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지르부카란 몽골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10대 후반 이후로는 주로 몽골에서 생활했다. 33세가 되던 1307년, 몽골의 후계 싸움에서 카이샨·아유르바르와다 형제 편에 섰고, 이들이 승리해서 카이샨 칸이 즉위하자 몽골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다음 해 충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계속 몽골에 머물며 원격 통치를 하다가 왕위를 아들 충숙왕에게 물려줬다. 그리고는 몽골 수도 대도(大都·베이징)에 만권당이라는 서재를 열었는데, 조맹부 등 명망 있는 한족 학자들이 후원을 기대하고 모여들었다. 충선왕은 고려의 인재가 그들과 함께하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이제현을 불러들였다. 이때가 1314년, 이제현 나이 28세에 첫 외국 경험이었지만, 당시 대도를 오간 사람은 많았으니 여기까지는 특별하다고 할 수 없다.

대도에 간 이제현은 2년 뒤 아미산으로 특별한 여행의 기회를 갖게 된다. 아미산은 사천성에 있는 산으로, 무협소설에 아미파의 본산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보현보살을 모신 불교 성지였다. 이제현은 몽골 칸의 명으로 보현보살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아미산에 파견되었는데, 당연히 충선왕의 추천이 있었다. 대도에서 아미산까지는 약 2500㎞로, 오가는 길에 황하를 건너고 정주·태원·서안·성도를 지났다. 왕복 5000㎞ 길을 다섯 달 만에 다녀왔으니, 한 달 평균 1000㎞를 가는 강행군이었다. 공무로 가는 출장이었으므로 조정에서 제공하는 역마와 배를 타고 안전한 역로와 수로를 이용했지만, 평소 말 탈 기회가 적었던 고려의 백면서생에게는 고된 여행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30세 젊은이는 여행의 흥분으로 고단함을 잊고 가는 곳마다 시를 지어 감흥을 표현했다. 그의 작시는 여행마다 계속됐고, 뒤에 『서정록(西征錄)』이란 이름으로 묶였다.

충선왕과 유유자적 강남 여행

아미산에 다녀온 지 2년이 조금 더 지난 1319년 3월, 이번에는 강남의 보타산에 다녀오게 되었다. 보타산은 절강성 항주 근처 앞바다의 작은 섬에 있는 산으로, 관세음보살을 모신 불교 성지였다. 독실한 불자였던 충선왕이 이곳에 향을 올리러 가면서 “이생(李生·이제현)이 없으면 안 된다”라며 특별히 수행을 명했던 것이다. 대도에서 보타산까지는 왕복 4000㎞가 훨씬 넘었지만 여정 대부분을 운하를 이용했던 만큼 흔들리는 말 위에서가 아니라 배를 타고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조정 실세의 행차였으므로 채비는 물론 주변의 대접도 융숭했을 터인데, 이제현은 여행 중 “배 가득 술 싣고 미인을 태웠으니”라고 노래했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에 쫓기지 않고 유유자적 관광을 즐겼는데, 진강·소주·항주·소흥·영파를 지나면서 진강에서는 금산사, 소주에서는 호구사와 고소대, 항주에서는 시인 소식과 연고가 있는 해회사 등 명소를 찾아다녔다. 배를 타고 강남의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충선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이러한 영광이 영원하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들떴을 것이다. 이때가 이제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충선왕 일행이 보타산에서 돌아온 직후 아유시리다라 칸이 사망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후원자를 잃은 충선왕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멀리 티베트의 사캬로 유배되었다. 대도에서 유배지까지는 1만5000리. 아마도 충선왕은, 비록 타의지만, 고려사람 가운데 가장 멀리까지 가 본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 사이에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있다가 왕의 유배 소식을 듣고 대도로 달려갔으나 만날 수 없었다. 대신 그곳에서 왕의 저택을 지키면서 몽골의 여름 수도인 상도(上都·네이멍구 정란치)를 오가며 구명 운동을 펼쳤다. 다행히 몽골에도 편들어주는 사람이 있어 충선왕은 1323년 대도에서 2000㎞ 떨어진 도스마(간쑤성 린샤)로 옮겨졌다. 이제현은 그해 4월 대도를 출발해서 충선왕이 있는 도스마로 향했다. 사적인 여행이었으므로 아미산 행이나 보타산 행과 전혀 다른, 초라하고 고생스러운 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현은 지나는 곳마다 시를 지어 기록으로 남겼다. 유비의 고향 탁군(허베이성 줘저우)과 위나라의 도읍 업성(허베이성 린장)을 지나면서, 또 장안(산시성 시안)에서는 측천무후의 능과 당 숙종의 능을 찾아서 시를 지었다. 그리고 7월 도스마에서 충선왕과 감격의 상봉을 했다. 9월 이순테무르 칸이 즉위하자 충선왕은 유배에서 풀렸고, 이제현은 왕을 모시고 대도로 돌아왔다. 이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고려 영토 10분의 7이 산” 발언도

이제현의 여행 거리는 2만㎞가 넘는다. 여기에 개경에서 대도까지 1200㎞를 수차례 왕복했으니 그것까지 더하면 3만㎞가 넘는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 이전에 이렇게 긴 여행을 한 사람은 없었다. 이제현 이후 조선시대에는 해외로 나가기가 어려웠다. 명과 청이 해금(海禁) 정책을 펴면서 조선 사람의 자유로운 입국과 여행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한된 인원만, 허용된 지역을 다녀왔다. 그중에서도 경제 중심지였던 강남 지방에 가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1487년 제주도에서 표류하는 바람에 영파(저장성 닝보)부터 북경까지 종단했던 최부가 유일할 정도다. 조선 후기도 마찬가지였다. 1780년 박지원이 이국 경험을 과시한 『열하일기』의 현장 열하(허베이성 청더)도 북경에서 불과 250㎞ 떨어진 곳이었다. 조선이 국제정세에 둔감했던 이유를 여기서도 찾을 수 있다.

견문을 넓히는 데는 여행이 제일이다. 거기 더해서 해외여행은 평소 모르던 우리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가 된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산이 많다는 사실을 만주 여행 중에 발견했던 경험이 있다. 이제현도 고려 영토가 좁고 10분의 7이 산이란 말을 했는데, 나가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지영재 교수의 『서정록을 찾아서』(푸른역사, 2003)를 참고했다.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