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을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낯익은 자줏빛 건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호암아트홀이라는 격조 높은 공연장이 있었다. 90년대 청춘의 한 시절, 프랑스 영화 ‘마농의 샘’을 봤다. 공연장은 삼성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아호 호암에서 따왔다.
마농의 샘은 보복에 관한 얘기다. 주인공 세자르(이브 몽탕)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애인 플로레트의 밭을 망치려고 샘을 막아버린다. 그러나 플로레트의 척추장애인 아들 쟝은 이 땅을 가꾸려고 ‘개고생’ 한다. 가뭄이 들자 쟝은 아내, 어린 딸과 멀리서 물을 길어 날라야 한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세자르는 웃고 있다. 결국 쟝은 샘을 파려고 바위를 폭파하다가 죽는다. 몇 년 뒤 세자르는 충격을 받는다. 플로레트가 자기 아이를 임신했으나 전쟁통에 연락이 없자 배속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지 않으려고 이웃 남자와 원치 않는 결혼했다는 것, 그리고 자기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쟝이 자신의 아이라는 것. 회심의 복수가 자신의 혈육을 죽인 행위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절치부심, 이를 악물고 한 보복이 부메랑이 되는 경우가 인간사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 달콤한 인생, 내부자 등 흥행몰이 조폭영화도 대부분 보복의 공식을 따른다. 한풀이식 보복은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문제는 정치권의 보복에 있다. 사회적 비용이 엄청나다. 권력을 잡을 때마다 전 정권에 보복하는 상황은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고 있다.
다시 ‘마농의 샘’으로 가보자. 주인공은 보복이 자기 핏줄에게 한 것으로 드러나자 “내 업보를 생각하면 지옥마저도 과분하다”며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이 고비고비 등장한다. 보복의 허망함을 우회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좌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한국형 보복 정치도 이제 이쯤에서 끝내면 좋겠다. ‘업보빔’,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 자줏빛 빌딩이 사라진 거리에서 느낀 감상이다.
김동률 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