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한국] 한 가족이 있다. 노년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장성한 네 딸. 그런데 70대 아버지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어린 아들도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또 있다. 꽃꽂이 강사로 일하는 사별한 큰딸은 유부남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고, 성실한 남편과 활기찬 남매를 둔 전업주부 둘째딸은 사실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다. 도서관 사서인 셋째딸은 결벽증 같은 성격으로 누구에게나 뾰족하게 굴고,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막내딸은 가족 몰래 무명 복서와 동거 중이다. 자연스레 ‘콩가루 집안?’이란 생각이 들 법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아수라처럼’의 타케자와 집안 이야기다.
얼굴생김과 성격, 가족 구성 상황까지 제각각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타케자와 집안의 네 딸들. 아버지 코타로(쿠니무라 준)가 헌신적인 어머니 후지(마츠자카 케이코)를 두고 몇 년간이나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누군가는 부부 간의 일이라며 간섭할 수 없다 하고, 누군가는 강력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나서는 등 도무지 해결이 나지 않는다. 자매가 아버지의 일을 의논하고자 자주 모이게 되면서 각자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나거나 서로 묵혀 두었던 갈등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 게 ‘아수라처럼’의 주요 내용. 표면적으로 보이는 주된 갈등은 아버지의 불륜이지만, 딸들이 각자 품고 있는 상황과 가족 간의 관계성도 못지않게 자잘한 갈등을 야기하며 주목을 끈다.
‘아수라처럼’의 시대 배경이 1979년 일본 도쿄임을 감안해도,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충격적인 일이다. 당장 우리집 이야기라고 생각해보자. 당장 아버지의 불륜을 사설 탐정을 고용해 캐낸 셋째 타키코(아오이 유우)에 빙의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또 한 숨 돌이키고 생각해보면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장 몇 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속이고 바람을 피운 아버지가 쉽게 어머니와 헤어질 것 같지 않고, 헤어지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아예 그 사실을 모르는 게 낫지 않느냐는 생각. 여기엔 혹여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갈라서서 그 뒷수습을 자식들이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살짝 깃들어 있을 수 있다.
그런 와중 남편 타카오(모토키 마사히로)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는 둘째 마키코(오노 마치코)는 유부남과 불륜을 저지르는 언니 츠나코(미야자와 리에)가 이해되지 않고, 어떻게든 언니에게 새로운 결혼 상대를 찾아주려 든다. 장성한 아들을 둔 츠나코도 이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쉽지 않다. 그런가 하면 셋째 타키코와 막내 사키코(히로세 스즈)의 묵은 갈등은 점차 심화된다. 어릴 적부터 공부는 잘했으나 연애운은 없었던 타키코와 달리 공부는 못했으나 얼굴이 예뻐 인기가 좋았던 사키코는 은근히 자격지심이 있었다. 남편이 된 복서 진나이(후지와라 키세츠)가 승승장구하자 사키코는 마음껏 언니들에게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고, 사설 탐정 카츠마타(마츠다 류헤이)와 사랑에 빠진 타키코는 진나이에 비해 초라한 카츠마타가 안타까운 마음과 동생에 대한 질투로 화가 난다.
‘아수라처럼’의 이야기들은 격렬하되 잔잔하게 표현되는 편인데, 그 잔잔한 표현 속에 폭풍과 풍랑이 몰아치는 감정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 말했던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고스란히 느껴진달까. 남들이 보면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의아할 만큼 수많은 감정이 순식간에 오가는 가족의 이야기인 만큼, 내 가족의 상황에 대입해 상상해 보는 재미도 있다.
또한 일본의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들의 연기와 그들의 앙상블을 보는 쾌감이야말로 이 시리즈의 큰 장점이다. 엄마 역을 맡은 1952년생 마츠자카 케이코는 노년 시청자들에게 한국계 일본인 배우 한경자로 친숙한 인물인데, 묵묵히 남편의 불륜을 모른 척하던 그가 순간 폭발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감정이 압권. 자매의 면면은 그야말로 화려하다. 90년대 일본의 아이콘이었다가 ‘토니 타키타니’ ‘종이달’ ‘행복 목욕탕’ 등 여러 작품을 거치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한 1973년생 미야자와 리에,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드라마 ‘마더’ ‘최고의 이혼’으로 유명한 1981년생 오노 마치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훌라 걸스’ 등 2000년대 한국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던 1985년생 아오이 유우, 그리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유랑의 달’ ‘키리에의 노래’ 등으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1998년생 히로세 스즈까지. 내로라하는 시대별 일본 여배우들의 총출동 아닌가.
여기에 ‘곡성’ ‘범죄도시3’로 친숙한 쿠니무라 준, ‘으라차차 스모부’ ‘굿바이’ 등으로 연기력과 대중성을 증명한 모토키 마사히로, ‘행복한 사전’의 마츠다 류헤이 등 남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보태진다. 드라마 자체가 도파민이 팡팡 터지거나 엄청난 흡인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원래 우리네 일상이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한 건 아니지 않나. 남의 일상을 훔쳐보듯 천천히 시간 날 때마다 한 편씩 보면 좋을 듯.
참고로 ‘아수라처럼’은 1979년 NHK에서 방송된 무코다 고니코 각본의 동명 드라마를 46년 만에 리메이크한 것인데, 일본에선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작품으로 유명하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브로커’ ‘괴물’ 등 한국에 상당한 팬덤이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마이코네 행복한 밥상’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넷플릭스 드라마 작품이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감성을 좋아한다면 역시 추천.
필자 정수진은?
여러 잡지를 거치며 영화와 여행, 대중문화에 대해 취재하고 글을 썼다. 트렌드에 뒤쳐지고 싶지 않지만 최신 드라마를 보며 다음 장면으로 뻔한 클리셰만 예상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다. 광활한 OTT세계를 표류하며 잃어버린 감을 되찾으려 노력 중으로, 지금 소원은 통합 OTT 요금제가 나오는 것.
정수진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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