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해주겠다더니, 나쁜 새끼….”
부인은 오열했다.
저주는 진심이었다, 죽은 남편에 대한….
“집 안에 혈흔이 많아요. 여기저기 튀고….
다 없는 일처럼 돌이킬 수 있을까요?”
여인의 의뢰를 받았을 때 덜컥했다.
‘나쁜 새끼’라는 원한의 감정.
처음엔 살인사건이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죽인 자가 죽은 자의 청소를 내게 의뢰할 리는 없다.
대체 누가 누구를 죽인 것일까.
의뢰인은 눈물을 참느라 중간중간마다 큰 숨을 들이마셨다.
울음이 섞인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고 되묻기도 뭐했다.
통화시간은 길었지만 상황을 이해하기 좀체 어려웠다.
상대방이 좀 진정이 됐지만, 뒤늦게 다시 자초지종을 정리하기도 머쓱했다.
약속한 대로 현장에 갈 뿐이었다.
서울 외곽 지방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였다.
요즘 지은 대단지 아파트들은 집 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행복’이 넘쳐난다.
잘 꾸며진 조경, 동마다 예쁘게 자리한 놀이터.
서울이든, 지방이든 요즘 신축 단지 안의 풍경은 무슨 구호처럼 ‘가정의 행복’에 충실하다.
그 행복한 아파트에 요즘엔 쓰지 않는, 써선 안 되는 표현이지만,
‘젊은 미망인’이 나를 기다렸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연령대를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40대의 여인으로 보였다.
곧장 집 안으로 들어가긴 힘들 것 같아 보였다.
아파트 옆에 있는 공원에서 잠시 대화를 했다.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게 낫겠죠?”
“네.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잠깐의 침묵 끝에 여성은 말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당첨된 아파트였어요.”
비극적 사건의 유족들은 터놓고 말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어차피 사정을 설명해야 할 나 같은 사람을 만나면, 어떨 땐 과할 정도로 속내까지 털어놓는다.
나는 조용히 들어줄 뿐이다.
그것이 남겨진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는 대학교 커플이었다.
어릴 때부터 오래 사귀었고, 또래보다는 이르게 결혼했다.
아들도 낳았다.
신축 아파트에 어렵게 당첨돼 입주도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가족이었다.
다만, 남편이 소위 분노조절장애가 있었던 모양이다.
화가 나면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격분해 길길이 날뛰었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는 학원에 가 있었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마트에 들렀다가 돌아왔다.
일찍 퇴근한 남편과 모처럼의 저녁식사.
그 행복이 뭐 대단한 거라고, 운명의 시샘이 많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