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과 자유’ 공존… AI 시대 공간의 가치 찾다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2025-02-25

(54) 서울 AI허브

옛 품질시험소 별관 부지에 들어서

국제 공모로 공유오피스 중심 설계

기준층 두 영역 나눠 다른 기능 부여

북·동쪽은 업무, 남·서쪽은 공유공간

기둥 배치·방향 등 구현 방식 차이

시너지 효과 결국 조직문화에 달려

전 세계 많은 기업이 새해 시작과 함께 주목하는 행사가 있다. 바로 매년 1월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Consumer Electronics Show)다. 이곳에서 기업들은 최신 가전제품과 미래 기술, 스타트업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확인한다. 가까운 미래나 최소한 올 한 해 기술 경향도 파악한다. 그래서 CES가 끝나면 기업의 경제연구원이나 컨설팅 회사, 테크 유튜버들은 자신들이 분석한 인사이트를 앞다투어 정리해 발표한다.

올해 CES에서 가장 주목받은 열쇠말은 단연 ‘AI(인공지능)’다. 사실 AI는 작년 CES에서도 주목받았었다. 다만 CES 2024에서 AI의 가능성과 잠재력 정도만 볼 수 있었다면 CES 2025에서는 ‘AI 에이전트’와 ‘온디바이스 AI’ 분야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상에 녹아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AI 연구는 1956년 미국 다트머스대학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시작됐다. 여기서 ‘인공지능’이라는 용어가 처음 쓰이기도 했다. 워크숍 이후 미국 정부는 AI 연구에 수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컴퓨터가 데이터를 보고 스스로 학습해서 판단하거나 예측하는 기계 학습(machine learning)이 등장하기 전까지 AI 연구는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AI의 도래를 실감한 건 2022년 11월 30일 오픈AI가 공개한 챗GPT였다.

챗GPT의 등장은 전 세계 기업과 정부, 심지어 도시까지 AI 열풍으로 밀어넣었다. 모든 문서에 ‘AI’, ‘지능화’라는 단어가 등장했는데 그러지 않으면 뒤처지고 있다고 여겼다. 대한민국의 수위 도시인 서울시도 작년 12월 양재 R&CD특구 내 40만㎡를 중소벤처기업부로부터 ‘양재AI 미래융합혁신특구’로 지정받았다.

그전에도 서울시는 양재 R&CD특구를 AI 산업의 허브로 조성하려고 했는데 그 첫 번째 앵커(핵심) 시설이 한국교원총연합회회관 4개 층에 2017년 개장한 ‘양재 R&CD 혁신허브’였다. 이후 인근 민간 건물의 일부를 활용해 사무실, 회의실, 공유오피스, 강의실 등을 확충했다. 그러다 2021년 옛 품질시험소 별관 부지에 ‘서울 AI허브(옛 AI지원센터)’를 착공했다.

서울 AI허브 설계안은 국제설계공모로 선정됐다. 당선작을 제출한 stpmj건축사사무소는 AI산업이 필요로 하는 업무환경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Mega Floor: Consolidated Boundary(통합된 경계)”라는 개념을 통한 ‘시너지를 생성하는 공유오피스’를 제안했다. stpmj건축은 건물의 기준층을 “도심 속 공원처럼 동선이 자유롭고 다양한 활동이 담기는 사회적 공간”으로 계획했는데, 심사위원들은 기준층에 대한 이런 해석과 이를 내부 공간 구성, 입면으로 확장한 부분을 높게 평가했다.

업무시설의 전형적 기준층은 볕이 잘 드는 외벽을 따라 책상이, 가운데에는 엘리베이터, 계단, 화장실, 설비시설이 집중된 코어가 배치된다. 당연히 구성원들끼리 만나고 교류하는 공유공간도 코어에 포함되는데 그나마 탕비실이 대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stpmj건축은 서울 AI허브의 기준층을 조망이 좋은 북쪽-동쪽과 채광이 좋은 남쪽-서쪽으로 크게 나누었다. 그리고 두 영역에 각각 다른 기능을 부여했는데, 북쪽-동쪽에는 입주사들의 업무 공간을, 남쪽-서쪽에는 커다란 공유공간을 배치했다. 북쪽-동쪽 영역은 일정한 간격의 기둥이 특징적인데 이 기둥들이 창밖으로 돌출되어 외부에서 봤을 때는 질서 정연한 인상을 준다. 기둥은 내부 공간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기둥 사이의 공간은 8명 정도가 사용할 수 있는 크기다. 이를 참고해 입주 기업의 규모에 따라 파티션이 설치된다.

반면, 남쪽-서쪽 영역은 공간을 나누는 어떤 요소도 없다. 사용 방식도 자유로운데, 상부가 트인 테라스와 두세 개 층을 연결하는 커뮤니티 계단이 수직적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남쪽-서쪽 입면은 북쪽-동쪽 입면과 달리 슬래브(slab)가 튀어나와 있다. 다만, 튀어나온 슬래브는 테라스가 있는 부분에서 불규칙하게 끊긴다. 기둥의 방향도 북쪽-동쪽 입면과 달리 각기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있다. 그래서 리듬감과 역동성이 느껴진다.

엄격한 규칙과 자유로운 변화가 대조적인 두 영역에서 공통된 요소는 기둥 사이에 오목하게 들어간 보(beam)다. 이에 대해 설계자는 자신들이 즐기는 ‘그림자놀이’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실제 오목하게 들어간 보로 인해 입면에는 마치 밸런스 커튼(valance curtain)을 친 것 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동시에 건물 안에서 바라보면 오목한 보가 기둥 사이에 놓인 아치(arch)처럼 보이기도 한다. AI라는 최첨단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물에서 고전적 요소인 아치가 떠오르는 장면은 건축의 숙명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AI나 4차 산업이 아니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대상을 건축물이 담을 수 있도록 기준층을 오픈 플랜(open plan)으로 설계하고 구성원들 간의 우연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유공간을 두는 접근 방식은 새롭지 않다.

전자는 산업혁명 이후 철근콘크리트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처음 등장했는데, 근대건축가 르코르뷔지에가 돔-이노(Dom-ino) 시스템을 통해 제안한 ‘자유로운 평면’과 미스 반데어로에가 주장한 ‘유니버설 스페이스(Universal Space)’가 대표적인 예다. 후자는 여러 분야의 융합으로 업무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에 따라 업무 공간이 다변화하면서 등장했다. 특히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미국 빅테크 기업의 본사에서 창의력을 높이는 방안으로 개인 업무 공간과는 별도로 종사자들이 자유롭게 공유하는 중립 공간(neutral space)을 만들면서 확산됐다.

문제는 건축은 공간을 만들 뿐 그 공간을 운용하고 사용하는 데 관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한계는 공유공간의 사용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실제 많은 기업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업무시설에 공유공간을 조성했는데, 어떤 곳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본사의 공유공간을 닮기도 했다. 하지만 공간을 사용하는 양상은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몇몇 기업은 회사 로비에 공유공간을 만들었는데 애초부터 구성원들이 실제 사용하기를 기대했다기보다는 기업의 이미지를 창의적인 것처럼 세탁하려고 외부인들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 더 컸다.

서울 AI허브가 설계자들이 언급했듯 여러 분야가 공존하며 시너지를 일으키는 “벽 없는 실험실”이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건축가들은 그 판을 제대로 깔았다. 남은 몫은 마치 AI의 미래가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에게 있듯이 건물을 지은 서울시와 이를 운영하는 서울대학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입주할 기업의 조직 문화에 달려 있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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