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2025-02-05

성폭력, 가정폭력, 교제 폭력은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폭력이 아니었다. 사적인 것이기에, 외부에 말하면 안 되는 수치스러운 것,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친밀한 관계의 폭력은 쌍방 과실이나 개인 간 다툼 정도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이 공고하기에 애정을 기반으로 한 친밀한 관계는 많은 것들을 가린다. 타인과의 관계에선 명확히 선을 넘었다고 인식되는 일들도, 친밀한 관계에서는 ‘사랑’이라 생각해 묵인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향후 더 큰 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스스로를 탓하는 고리가 된다. ‘내가 잘못해서’, ‘나만 가만히 있었다면’, ‘내가 참았다면’과 같은 생각들이다. 이런 자책은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이하 성폭력상담소)는 국내 대표 여성 단체 중 하나로 친밀한 관계의 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꾸기 위해 수십년 간 노력해왔다. 2023년 기준으로 성폭력 피해자 상담 지원을 한 건수는 9만700여건에 달한다. 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를 상담하고 지원하면서 이 같은 폭력이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고,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강조해 왔다. 2년에 한 번 여는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은 이런 역할을 하는 주요 사업 중 하나다. 성폭력 피해자부터 교사, 경찰, 사회복지사, 연구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한 이 교육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왜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무마할 수 없는지 상세하게 알려준다.

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에서 일하고 있는 박아름 활동가를 만나 친밀한 관계의 폭력에 관한 특성은 무엇인지, 사람들의 인식을 개선하려면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물었다.

- ‘성폭력 전문 상담원 교육’이 2025년이면 33기에 이른다. 이 교육을 듣고, 직접 피해자를 상담하면서 어떤 점이 도움이 됐나.

“이 교육의 가장 큰 장점은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내 잘못이 아니다’라는 걸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친밀한 관계, 교제 관계에선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돌아보게 된다. 나 역시 과거에 교제 관계에서 원치 않은, 동의 없는 성관계를 경험했다. 상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던 성관계가 자꾸 생각나는 것도 괴로웠다. 그런데 직접적인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던 건 아니고 또 사이가 좋을 때는 애정 표현도 하는 관계였으니 헷갈렸다. 내가 상대방을 ‘가해자’로 부를 수 있는지, 그 일을 ‘폭력’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지.

교육을 들으면서 그 혼란이 처음으로 조금 정리됐다. 이런 경험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란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내가 느낀 불쾌한 감정, 트라우마 같은 증상은 내가 예민해서 나타나는 게 아니었다. 물리적 폭행만 없었을 뿐, 그 자체로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스스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고, 나중에 피해자들과 상담할 때도 이 경험과 학습 과정이 좋은 토대가 됐다.”

이 교육은 총 100시간이다. 다음은 2023년 상담원 교육의 강의 내용이다.

● 여성인권과 반성폭력 운동의 역사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사)

● 남성성과 문화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 연구소 연구원)

● 젠더 관점으로 해석하는 성폭력 법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수사재판절차의 이해 및 피해자 권리 보장 제도 (이도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상근변호사)

● 성폭력 2차 피해와 역고소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 가정폭력 피해 이해와 지원 (최유연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소장)

●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 및 스토킹 피해 이해와 지원 (송란희 한국여성의전화 대표)

●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심리 치유의 이해 (최현정 트라우마치유센터 사람마음 활동가)

● 여성주의 상담의 이론 및 실제 (김은아 상담심리센터 위민 대표)

● 대상별·관계별 성폭력 상담 실습

- 교육의 어느 부분이 도움이 됐나.

“성폭력이 젠더 위계에 따른 사회 구조적 문제라는 걸 일깨워준 게 주효했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 경험은 이중잣대로 평가된다. 남성의 경험은 자랑거리이지만, 여성의 경험은 순결을 잃은 것이거나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인식 아래에선 같은 성 경험에도 여성은 더 많은 의미 부여를 하거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특히 박 활동가는 우리 사회에서 친밀한 관계, 그중에서도 남녀 간의 연애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가부장적 연애 각본’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 ‘연애 각본’이 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연애에 일정하게 짜인 각본이 있다는 것이다. 남성이 리드하고 여성은 따르는 것, 상대방이 다른 이성과 친해 보일 때 질투하는 것, 상대방의 팔목이나 몸을 ‘박력 있게’ 잡아끄는 것, 처음 성관계를 한 사람과 결혼까지 가는 것, 오랜 첫사랑…. 이런 것들이 성공적이고, 좋은 연애인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교제 폭력의 많은 부분이 이 각본에 맞춰 통제된다. 가해자들이 많이 하는 변명 중 하나가 ‘사랑해서 그랬어’다. 하루종일 어디서 누구와 뭐하는지 보고하게 하고, 옷차림을 통제하고, 간섭하는 문화가 이런 각본에서 비롯된다. 내가 과거에 겪은 일 역시 이 각본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각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걸 교육을 통해 알게 됐다. 막연히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일에 대해 성폭력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그게 잘못이라고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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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피해자들을 상담해보면 친밀한 관계의 폭력의 공통적 특성이 있나.

“인터넷에 보면 ‘최악의 친구의 연애 상담 유형’ 같은 게 있다. 거기서 손꼽히는 게 ‘힘들다고 해서 한참 얘기 들어줬는데, 결국 안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친구’다. 웃자고 만든 거겠지만, 실제 폭력 피해자 중엔 그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교제 폭력은 어떤 사실만 뚝 떼어놓고 보면 피해자인데도 오히려 가해자보다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상대에게 맞고도 바로 신고하지 않고, 거절 의사를 제대로 표시하지 않고, 자신에게 해악적인 관계를 이어가는 것 등이다. 당연히 제3자는 답답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때 단순히 관계를 끝내라고 하거나 ‘너 왜 그랬어’라고 추궁하는 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제대로 보려면 개인의 생애사적 맥락을 함께 살펴야 한다. 피해자와 상담을 하면서 신뢰 관계가 쌓이면 피해자의 평소 성향이나 대화 패턴부터 가정환경, 유년 시절, 욕구나 결핍 등을 알게 된다. 그러면 피해자가 상대방을 만나는 과정에서 어떤 결핍이 채워졌는지 알 수 있고 그게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라는 걸 이해할 수 있다.

재판부에 의견서를 낼 때도 이런 점을 강조한다. ‘이 사람은 평소에 거절을 잘 못 한다. 이 정도의 표현이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수준의 거절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런 맥락을 함께 살펴야 친밀한 관계의 폭력의 맥락을, 그 피해자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피해를 고백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보여야 하고 어떻게 도움을 줘야 하나.

“일단 중요한 건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 뭔지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사람마다 바라는 대응도, 대응에 필요한 시간도 다르다. 누군가는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것에 만족하고, 또 누군가는 상대가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에서 만족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질책하기만 하면 피해자는 오히려 그 왜곡된 상황과 관계에 고립될 수 있다.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되더라도 믿어주고 존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피해자도 스스로를 믿을 수 있고, 자신을 비난했던 걸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게 치유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 사회의 인식이 변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제 폭력, 성폭력 등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해자, 생존자는 어디에나 있다. 이건 가해자와 생존자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 꼭 수사나 재판 기관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며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된다. 사회 전반에 이들을 위한 ‘지지 자원’이 많이 늘어나야 한다. 성폭력상담소의 상담원 교육이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 김정화 기자 cle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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