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그리고 정승희씨

2025-02-05

“나 어디서 왔어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아무도, 아무도.

그녀는 세 살 이전의 ‘나를 모른다’.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태어난 해(1993년) 말고는 내가 어느 달 어느 요일에 태어났는지. 성이 왜 정씨인지. 승희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줬는지. 산골 간이역처럼 쓸쓸하고 적막한 기억의 첫 페이지, 그녀는 춘천의 보육원에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자신에게 엄마아빠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서 그리움이라는 돌림노래가 시작됐다.

“그리워.”

입 없이, 목소리 없이 혼자 부르는 돌림노래였다. 그러다 문득, “내가 그리워하는 건 뭘까?”

처음부터 ‘없음’이었던 존재를 그리워할 수 있나? 실루엣조차 본 적도, 살며시 살갗이 스친 적도, 얼핏 체취를 맡아본 적도, 메아리 같은 희미한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 없는 존재. 없고, 없고, 없고가 눈금자의 눈금들처럼 촘촘히 강박적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존재를 그리워할 수 있나?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몇 달 뒤 그녀는 자퇴했다(1년 뒤 그녀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는다). 자퇴를 고민할 때 보육원에 봉사를 오던 콜린 브라운 선생님이 말했다. “승희, 너 하고 싶은 거 해.” “승희, 네가 선택할 수 있어. 네 마음도 네 선택이야. 네 마음이 불행한지, 행복한지도.”

보육원의 서재에 있는 책들 속에 파묻혀 지내던 그녀에게 어느 날 보육원 국장님이 서류 하나를 보여주었다. “너는 세 살 때 보육원으로 보내졌어. 그리고 위탁모가 있었단다.” 그녀는 서류에 주소가 남아 있는, 강원도 횡성의 위탁모 집을 찾아갔다. 실오라기 같은 뿌리라도 손에 쥘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하지만 그녀가 마주한 것은 빈 공터. 없음.

“네 마음에는 칼이 있구나. 그 칼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도 있어. 그리고 너 자신도 해칠 수 있어.” 열일곱 살 그녀에게 번개처럼 날아든 어느 봉사자 선생님의 한마디. 그녀는 자신 안의 칼을 어떻게 다룰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원망, 분노, 미움으로 가득하던 일기장에 그녀는 매일 감사한 일 열 가지를 의무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실체 없는 존재를 용서하는 마음이 서서히 생기면서, 엄마아빠를 집요하게 향하고 있던 물음표가 방향을 틀더니 그녀 자신을 향했다.

“나는 뭘 할 수 있는 사람일까?” 자신에 대한 안쓰러움을 버리게 되면서 그녀는 “나로 살고 싶어”졌다.

“넌 멋진 사람이야. 넌 좋은 사람이야.” 한결같이 말해주는 사람과 가정을 이뤘지만 그녀는 아이는 낳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지키지 못하는 엄마가 될까봐 두렵던 그녀는, 남편이 아이를 너무나 바란다는 걸 알게 됐다. “난 아빠 되고 싶어. 네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서 말을 못했어.” 그 순간 그녀는 아이를 낳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서른 살까지 자신의 선택에 집중하며 살아보고 싶은 대로 살았다. 처음 그녀의 선택은 고등학교 자퇴. 두 번째 선택은 대학교 자퇴. 스타벅스에서 2년 동안 풀타임 아르바이트.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10개월. 스물다섯 살에 춘천 한림대 앞에서 ‘서툰 책방’을 열었다.

“승희, 네 선택이야?”

“콜린 선생님, 내 선택이에요.”

그녀는 아이를 잘 키우겠다,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고 아이에게 “네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아이 낳고, 그녀는 세 살 이전까지 자신을 키워준 위탁모를 생각하곤 한다. 그분은 자신의 존재를 기억도 못할 아기를 집에 데려가 사랑을 주고 때가 되자 이별했다.

흘러간 물, 흐르고 있는 물, 흘러오지 않는 물. 뒤돌아보지 않는 오르페우스인 그녀는 지금 자신의 손에 흘러 고여 있는 물을 선택했다. 흘러간 물은 쓸 수 없다. 아직 흘러오지 않은 물도. 그녀는 자신의 손에 흘러들어 고여 있는 물로 자신의 얼굴을 씻고, 맑아진 얼굴로 아기를,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이들을 바라본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어느덧 1년. “엄마는 바보. 힘들어도 날 키우지. 아기를 키우면서 내가 느끼는 행복도 못 느끼고.”

(엄마) 없음 위에 (엄마) 그녀가 잔잔히 그리고 위풍당당 떠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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