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기관들이 급변하는 제도적·기술적·지정학적 환경 속에서 혁신 경영의 갈림길에 서 있다. 한편으로는 국가 경제성장의 디딤돌 역할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 서비스를 선진화해 글로벌 경쟁력을 창출해야 한다. 이항용 한국금융연구원장은 11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금융산업은 ‘실물경제를 뒤에서 밀어주는 보조적 산업’이 아닌 ‘앞에서 이끄는 전략산업’이 돼야 한다”면서 “규제를 과감히 풀어 금융산업의 성장 엔진에 불을 지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제는 금융기관끼리 경쟁하는 시대가 저물고 금융사와 비금융사가 경쟁하는 시대”라면서 “금융사가 인공지능(AI)을 비롯한 혁신 기술을 적극 활용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축적한 데이터 등을 활용해 기본 업무 이외의 ‘부수 업무’ ‘위탁 업무’ 등 신사업에도 활발히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의 금융사들을 글로벌 투자은행 수준으로 발돋움시키려면.
△그동안 역대 정부와 국민들은 금융산업을 ‘실물경제를 뒤에서 밀어주는 보조적 산업’ 정도로만 여겼다. 이런 사고의 틀을 넘어서 ‘금융산업도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산업·전략산업’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초거대 플레이어들이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또한 AI를 비롯한 디지털 기술들이 금융 서비스와 빠르게 융합하면서 새로운 성장산업을 발전시키는 중이다. 따라서 국내 금융회사들도 자본을 더 많이 쌓고 자산 운용의 효율성을 높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AI와 같은 첨단 디지털 기술들이 금융 서비스에 보다 빠르게 융합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은행과 보험, 증권 분야 간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최근에는 금융과 비금융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금융회사들도 신탁·요양 사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해 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도록 제도적 정비가 이뤄진다면 고령화 시대의 화두로 대두하는 은퇴자들의 노후 소득, 복지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급변하는 경제 여건 속에서 이재명 정부의 최우선 금융정책 과제는.
△그동안 금융 자금이 부동산 분야에 과도하게 공급됐다. 그 결과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늘어 민간소비를 제약했다. 금융회사들이 부동산담보대출 위주로 영업하다 보니 내부적으로 혁신적인 금융 서비스를 이루는 데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이재명 정부는 성장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금융이 보다 ‘생산적인 부분’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부분’에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해 경제성장을 견인해야 한다. 자영업 부실화 문제도 고민해야 할 사안이다. 지금 정부에서 소상공인 채무 조정이나 부채 탕감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정책을 거기에서 끝내서는 안 된다. 자영업 부실화가 악순환하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저출생 고령화로 자영업 시장에 진입하는 은퇴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상황에서 금융정책과 노동·복지정책 등을 복합적으로 처방해야 자영업의 구조적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국내 금융사들의 국제화·선진화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과거에 비해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국제화와 선진화 측면에서 가시적 성과를 이뤘지만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작다. 일본의 금융그룹들은 수익의 약 50% 정도를 해외에서 벌어들이고 있다. 그에 비해 우리의 4대 금융지주가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익 비중은 10% 내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금융회사들이 해외 진출을 할 때 상대국에서 라이선스를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가지 난관이 있지만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현재 국내에 들어와 있는 해외 근로자들을 위해 해외 금융기관의 한국 진출을 허가하면서 우리 금융사들의 상대국 진출 라이선스를 얻는 정책적 딜(deal)도 고려해볼 만하다. 은행업 위주로 추진됐던 해외 진출의 범위를 넓혀 증권·보험 분야의 글로벌화를 적극 추진하고 한국이 강점을 가진 금융 인프라까지 함께 수출하는 방안도 모색해야 한다.
-가상자산 시대에 통화 주권을 지키면서 금융산업 혁신을 이룰 방안은.
△요즘 가장 뜨거운 이슈는 스테이블코인이다. 국회에도 ‘코인 발행’과 관련된 입법안들이 다수 제출돼 있다. 이제는 발행 문제를 넘어 유통 이슈도 다뤄야 한다. 무엇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뿐 아니라 달러 등과 연동된 외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규제 체계를 어떻게 마련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자본 유출, 자금 세탁, 조세 회피 위험이 늘어날 우려에도 대비해야 한다. 가상자산거래소를 통하면 온라인으로 코인 지갑을 만드는 단계에서 개인 실명이 확인되지만 온라인에 연결되지 않은 코인 지갑인 ‘콜드 월렛’을 통한 거래는 실명 확인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 P2P(개인 대 개인) 방식을 통한 ‘지갑 대 지갑’의 거래도 금융 당국의 모니터링을 피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준비는 돼 있나.
△앞으로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은 예금이나 단기국채로 이어지도록 설계될 것 같은데 우리나라 단기국채 중에는 만기가 짧은 국채가 별로 없다는 점도 정책적으로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이로 인해 잔존 만기가 3개월 이하인 국채에 수요가 몰리거나 갑자기 환급 사태가 일어나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도 있다. 시중금리가 급격히 오르면 이자를 주지 않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서 투자자가 대규모로 이탈하는 코인런(coin run)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다양한 리스크들에 대비해 제도를 설계하고 규율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정보통신기술(ICT)의 급격한 발달로 초지능·초연결 시대가 열리고 있다. 기술 주도의 금융 혁신을 위해 어떤 정책적 지원이 필요한가.
△과거에는 미국 프로야구인 ‘메이저리그’가 풋볼 리그인 ‘NFL’과 관객을 두고 경쟁했다면 지금은 스트리밍서비스인 ‘넷플릭스’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금융산업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은행과 은행 간, 은행과 증권, 보험사 간 경쟁처럼 금융기관끼리 경쟁하는 시대가 지나고 금융사와 비금융사가 경쟁하는 시대를 맞았다. 이런 큰 그림을 보면서 금융사의 기본 업무에서 벗어난 데이터 분석, 컨설팅 등의 ‘부수 업무’와 금융사의 업무를 비금융사에 맡기는 ‘위탁 업무’ 분야에서 기술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규율 체계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 금융업은 결국 정보산업이기 때문에 금융사들이 내부적으로 축적해온 데이터를 활용해 다양한 파생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경제학·경영학을 공부했던 사람들과 공학을 전공한 인재들이 서로 적극 교류해 금융 혁신을 일으킬 수 있도록 시장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규제 특례를 주는 샌드박스 제도 등을 적극 활용해 금융 혁신의 판을 깔아줘야 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 금융사들에 “주택담보대출 같은 이자 놀이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투자 확대에도 신경 써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렇다면 정부가 부동산 대출보다는 기업의 생산적 활동에 더 많은 금융 자금이 공급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써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을 비롯한 국제적 금융 기준과 규범 내에서 가계대출에 대한 위험 가중치를 높이고 기업대출에 대해서는 가중치를 낮출 필요가 있다. 기업에 대출을 하려면 그 기업의 미래 가치와 재무 현황, 업황 등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기업여신 담당자들의 전문성을 높이고 업무 성과에 대해 더 많은 인센티브를 줄 수 있도록 업무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인사 평가의 핵심 기준인 핵심성과지표(KPI)에 기업 여신 관련 업무 성과를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만 금융기관은 본질적으로 고객의 예금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보수적으로 자금을 운용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험적 투자 자본을 시장에 충분히 공급하려면 은행뿐 아니라 자본시장을 두 바퀴처럼 상호 보완적으로 활성화하는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가계부채를 적정 수준으로 관리할 방안은.
△각계각층에서 가계부채를 줄이기 위해 여러 방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를테면 은행 대출 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에 대한 위험 가중치를 상향 조정하는 방안이나 정책금융의 지원을 받는 대출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도 논의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방안들은 단기간에 실행되기보다는 금융권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조금씩 실행될 필요가 있다. 다만 금융정책만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경제 활력을 높여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주택 공급 정책도 원활하게 이뤄져야 한다. 건전한 금융 생활에 대한 국민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He is…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 배문고와 서울대 국제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원, 한국개발연구원(KDI) 부연구위원으로 재직 후 한양대에서 경제금융학부 교수를 지냈다. 기획재정부 자체평가위원회 거시분과 위원장, 신용회복위원회 위원, 예금보험공사 비상임이사, 새출발기금 이사회 의장, 금융위원회 금융발전심의위원 등을 역임했다. 학계에서는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방문교수, 한국금융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