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DNA를 고쳐 질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2023년 말, 영국과 미국 정부는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활용한 최초의 세포치료제, ‘카스제비(Casgevy)’를 승인했다. 이 치료제는 제약회사 버텍스와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개발한 것으로, 흑인 500명 중 한 명 비율로 발생하는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을 대상으로 한다. 이 질환은 글로빈 유전자 변이에 의해 적혈구가 비정상적인 C자 모양으로 변형되어 온몸에 산소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게 되는 유전병이다. 그 결과 환자는 평생 심각한 빈혈 증상과 고통 속에 살다 대개 5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다. 카스제비는 환자의 조혈모세포 DNA를 교정해 정상적인 글로빈 단백질을 발현시킴으로써 환자들에게 완치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는 인류가 DNA를 직접 수정해 질병을 치료하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영·미, 첫 크리스퍼 치료제 승인
DNA 수정 치료 시대 진입 의미
한국에선 관련 임상시험 없어
혁신엔 지속적 투자·지원 필요
낫 모양 적혈구 빈혈증은 그 원인 유전자가 밝혀진 최초의 유전 질환이다. 현재까지 혈우병, 듀센 근위축증, 낭포성 섬유증 등 6000개 이상의 유전 질환이 보고되었다. 대략 50명 중 한 명의 신생아가 유전 질환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유전 질환은 치료제가 없어서 환자는 평생 고통받다가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유전질환자는 부모로부터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물려받기도 하지만, 부모의 체세포에는 없는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흔하다. 후자는 부모의 정자 또는 난자세포에 돌연변이가 새롭게 발생하여 초래되거나 환자의 체세포에 새로운 변이가 발생하여 초래된다.
돌연변이는 모든 생명체의 숙명
유전 질환의 원인이 되는 돌연변이는 왜 발생하고 이를 피할 수는 없을까. 답부터 말하자면 돌연변이는 모든 생명체가 가진 숙명으로, 이를 피할 수 없다. 방사능·자외선·발암물질을 포함한 다양한 화합물들이 DNA에 변이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을 운 좋게 모두 피하더라도 세포 내에서 대사과정 중 자연 발생하는 활성산소에 의해 돌연변이가 발생하기도 하고, 세포 분열과 증식에 필요한 DNA 중합효소가 DNA를 복제할 때 수억 분의 1의 확률로 실수하기 때문에 저절로 발생하기도 한다. 돌연변이는 유전 질환과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생명체가 진화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돌연변이가 드물기는 하지만 유전자의 기능을 향상할 수도 있고, 특정 질병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유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돌연변이가 없다면 모든 자손이 부모와 100%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집단은 질병과 환경 변화에 취약해 결국 멸종할 수밖에 없다. 사실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는 조상의 돌연변이를 물려받아 생존하게 된 것이고, 새로운 돌연변이를 다음 세대에 물려준다.
유전자치료는 유전 질환자에게 정상적인 유전자를 투여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 혈우병을 비롯한 수십 개 질환에 대한 치료제가 성공적으로 개발되었다. 카스제비와 같은 크리스퍼 유전자가위 기반 유전자 교정 치료는 이러한 일반적인 유전자치료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유전자치료는 결함 있는 유전자를 그대로 두고 정상 유전자를 추가로 환자 세포에 도입하는 방식인 반면, 유전자 교정은 손상된 유전자를 직접 고쳐 정상 상태로 복구하는 방식이다. 이를 자동차 수리에 비유하면, 터진 바퀴를 교체하지 않고 다섯 번째 바퀴를 추가하는 것이 전통적 유전자치료라고 할 수 있고, 터진 바퀴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것이 유전자 교정이다. 카스제비는 후자의 접근법으로 높은 안전성과 치료 효율성을 입증하였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질환에 대해 수십 건의 유전자 교정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아직 국내에서 수행되는 임상시험은 없다.
질병에 강한 동·식물 만들 수 있어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세균의 면역체계에서 유래했다. 세균은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크리스퍼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퍼는 세균 DNA 내에 바이러스 DNA의 조각이 일정 간격으로 삽입된 구조를 말하며, 이 조각들은 같은 바이러스가 다시 침입했을 때 이를 기억해 공격하는 데 활용된다. 크리스퍼 시스템은 카스 단백질과 작은 가이드 RNA 분자들의 협력을 통해 바이러스 DNA를 절단하며, 세균을 보호한다. 2012년, 제니퍼 다우드나와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교수팀은 크리스퍼 시스템을 이용해 시험관에서 특정 DNA를 절단할 수 있음을 입증했으며, 이 기술이 인간 세포의 유전자 교정에도 활용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후 2013년 1월, 서울대 연구팀을 비롯해 미국 유수 대학의 연구진이 각각 독자적으로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를 인간 배양세포에 도입해 유전체 DNA를 자르고 교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논문을 발표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동식물의 유전자 교정에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생쥐와 같은 실험동물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 소와 돼지 같은 가축의 특정 유전자를 제거하거나 교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질병 내성과 같은 다양한 특성을 가진 동물이 만들어졌다. 또한, 벼·옥수수·감자 등 농작물의 유전자에 변이를 도입해 질병에 강하고 생산성이 높은 종자를 개발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크리스퍼 유전자가위는 기초과학 연구의 중요성을 입증하는 좋은 사례다. 세균에서 유래한 단백질과 RNA 연구가 인간과 동·식물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는 혁신적 도구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혁신이 가능하게 하려면 기초과학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하다.
◆김진수=유전자가위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국제학술지 네이처가 2018년 ‘동아시아 스타 과학자 10인’중 한 명으로 꼽았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생명공학기업 툴젠의 창업자이며, 서울대 교수와 기초과학연구원(IBS)의 유전체교정연구단장 등을 역임했다.
김진수 툴젠 창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