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세기는 기술이 곧 국력인 시대다. 경제, 안보, 외교까지 국가의 모든 역량이 기술력에 의해 결정된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핵심 개념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기술주권'이다. 기술을 단순히 개발하는 데서 그쳐선 안 된다. 그것을 지켜내고, 활용하며, 법과 제도로 보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주권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지식재산(IP)이다.
한국은 세계 4위의 특허출원국이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출원 비율은 세계 1위다. 겉으로 보기엔 기술강국이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보면 기술 보호는 허술하고, 침해에 대한 대응력도 부족하다. 기술은 있지만, 주권은 없는 나라--이것이 우리의 민낯이다.
최근 반도체 패키징 공정 중 하나인 '캐필러리' 기술이 중국에 유출될 뻔한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이 해외로 빠져나가려는 순간, 김포공항에서 담당자가 긴급체포됐다. 지식재산 보호의 허점을 여실히 드러낸 상징적인 사례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최근 5년간 111건의 산업기술이 해외로 유출되었고, 피해액은 23조 원에 달한다. 이 중 36건은 국가핵심기술이다. 기술탈취는 더 이상 개인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산업 침탈 행위에 가깝다.
특히 중소기업은 속수무책이다. 기술을 빼앗기고도 소송조차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 법률 지원도, 전문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지식재산 제도는 피해자가 아니라 침해자의 편에 서 있다는 냉혹한 비판을 받는다.
이제는 선언이 아니라 실행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기술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선 다음과 같은 구조적 개혁이 절실하다.
첫째, 국가 지식재산 컨트롤타워를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 직속 지식재산비서관을 신설하고, 현재 과기정통부 산하로 격하된 지식재산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상설기구로 격상시켜 정책 기능을 통합해야 한다.
둘째, 특허심사 기간을 대폭 단축해야 한다. 심사 기간을 10개월 이내로 줄이고, 기술이 유출되기 전에 특허로 방어할 수 있도록 '보안특허 트랙'을 신설해야 한다. 비밀 유지와 신속 심사가 함께 보장돼야 한다.
셋째, 기술분쟁 전문법원을 도입하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 기술을 훔친 자는 반드시 책임지게 해야 한다. 실효적인 법적 억지력이 없으면 기술 보호는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넷째, 기술유출 대응 시스템을 전국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지역별 기술보호데스크를 확대하고, 특허청 특별사법경찰 조직을 강화해 실시간 감시와 수사가 가능한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지식재산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기술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기술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만이 미래를 이끌 수 있다. 기술주권이 흔들리는 순간, 국익도 함께 흔들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닌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