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 과학] 검증의 책임과 권위 구조

2025-03-13

2006년도 칸 국제광고제(현 명칭 칸 라이언즈) 수상작 중에서 아직도 블로거들 사이에 회자되는 작품이 있다. 독일의 어느 노동거래소의 광고인데 이직이 필요한 사람의 근무환경을 자판기 안에 들어가서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모습으로, “잘못 선택한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는 문구와 함께 표현한 것이다. 여러 이유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림이지만 무미건조한 노동을 기계에 위임하는 의미로 사용된 소재로서의 자판기는 우리 일상의 일부가 된 자동화 기술의 대명사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영역에서 우리의 직무는 과연 어느정도 기계에 의해 대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의문과 더불어, 과연 우리가 자동이라고 생각하는 기기 중에서는 얼마정도가 여전히 막후에서 사람의 손으로 조작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자판기 공급사 직원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지나가다 보이는 자판기가 정말로 자판기(自販機)인지 (속에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은지) 매번 확인해 보지 않는다. 자판기는 휴대할 만한 크기의 물건이나 식음료 몇 가지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다가 소비자가 선택하고 결제한 시점에 내어주는 일을 자동으로 하면서 전기를 사용한다는 설명을 믿고 있을 뿐이다. 눈앞에 자판기처럼 생긴 것이 실제로는 자판기가 아닐 수도 있을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려면 자판기를 열어보아야 하지만, 열쇠도 망치도 갖고 있지 않다면 기계를 오래 지켜보며 밤중에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것으로 자판기가 맞다는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의 감각기관을 직접 거쳐서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도구의 사양이나 자연 현상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유아기까지는 우리의 관찰력을 사용해 주변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얻게 되며 이렇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 양식을 수정해 나간다. 이렇게 얻을 수 있는 지식이 거의 남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타인의 설명을 기초로 눈앞의 도구나 자연과 상호작용하여 그 설명이 맞고 그 설명을 해준 주체에 대한 신뢰를 굳혀 나가는 방식으로 우리는 현실을 인식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일차적 지식은 본능적이고 자발적으로 습득이 되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이차적 지식은 인위성이 많이 작용한다. 우리의 감각과 인식이 현실에 기반한 것인지 확인해 보려 한다면 끝도 없을 것이고, 우리는 집단 차원에서 인식하는 다방면의 현실을 서로 공유하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굳혀 나간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신뢰를 기반으로 매일 새로운 관찰에 대한 해석을 우리의 인식체계에 큰 어려움 없이 덧붙여 나갈 수 있다.

과학적 방법이라 불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회 전반의 발전에 눈에 띄는 성과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이후의 시대를 우리는 과학 시대라고 부른다. 그동안 과학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사용되던 방법이 실험실 밖에서도 일반인들이 진실에 도달하는 주요한 방법이 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정밀함 내지 진지함으로 (또는 동일한 공동체 의식으로)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거나 영역을 넓혀가는 데 임하지는 않는다. 지식의 소비자들은 결국 이차적인 정보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여 그 일관성을 근거로 인식체계를 확장해 나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논리적 건전성이나 전제 사항의 진실성이 “삐끗”하면 이후의 결론들은 모두 무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의식할 점은 논리의 중간 단계에서 오류나 의도적인 거짓이 들어오더라도 결론은 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새로운 발견을 위한 탐색 작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금까지 인류의 지식으로 얻어낸 과학적 결론이 참이든 거짓이든 올바르게 인식된 것인지를 확인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를 다양한 형태로 반복하여 재현함을 통해 인류의 지식체계를 돌다리처럼 확고하고 질서정연하게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세계 과학자들의 공동체적 책무이며, 이를 위해서는 일관된 언어로 검증 과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일관된 언어’는 2차대전 이후 영어로 굳혀져 갔으며 문학적, 수사적 표현을 모두 담은 영어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관찰된다”라는 형태의 건조하고 (분야의 전문 용어를 제외하면) 현지 고등학교 수준의 어휘로 이루어진 ‘기술적 영어’를 의미한다. 산업혁명과 국제화로 인해 과학이 ‘민주화’되기 전까지는 과학 연구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연구 논문이나 서한에서도 온갖 수사적, 계층 과시적 표현이 난무하여 오늘날 우리가 번역본을 읽으려 하더라도 집중력이 급 저하됨을 느낄 것이다. (이는 라틴어나 한문으로 기록된 중세 학술 문헌에서 관찰되기도 한다.) 많은 국가가 공교육을 통해 기초학력을 보장하는 오늘날에 이르면서 이러한 매개 언어의 단순화는 독자층을 보다 더 넓히는 탈권위의 모습과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언어이기에) 획일화된 모습의 양면성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부정할 수 없는 결과로서 과학적 지식은 전에 없던 속도로 전파와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특히 누구든 이차적인 과학적 지식에 대해 검증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과학을 자기강화적 지식체계로 만들었다. 물론 어느 체계든 스스로를 강화시키려면 성공과 실패의 양쪽 사례로부터 학습해야 한다. 하지만 초기 형태의 과학적 방법은 대략적으로 규칙성 발견하기, 가설 수립하기, 실험으로 검증하기, 반복된 실험의 결과를 취합하여 보편적인 이론 또는 법칙으로 정립하기 순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통제된 조건에서의 실험 결과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통제되지 않은 일반적인 환경에서도 실험으로 검증된 자연 현상이 재현될 것이라는 종합 명제(綜合 命題)의 형태로 이론이 세워진다. 과학적 방법을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려 하는 사상을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라고 한다. 하지만 100가지 사례에서 검증이 된 가설도 한 가지의 반례로 인해 완전히 부정될 수 있고, 그럴 경우 그 시점까지 정설로 받아들여지던 이론은 완전 폐기되어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소모적인 처방을 수반한다. 과학이 이런 극단적인 형태의 ‘완전 실패를 통한 학습’을 거치기보다는 기존 이론의 일부만을 조금씩 수정하여 다시 새운 가설을 검증대에 오르도록 하는 과정의 반복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모형인 가설연역법(假說演繹法)이 이후 제안되었고, 과학 절대주의자들(과학적 지식을 절대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모형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형이 성립하려면 검증하려는 이론이 반증도 가능하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일부 사업가들이 온갖 사업명을 ‘○○과학’으로 포장하여 과학의 대중성에 편승하려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편, 이론 검증 시도의 실패가 당시에는 (원 제안자의 명성이나 자존심 등으로 인해) 실패의 사례가 아닌 변칙현상(變則現象)으로 인식되어 해당 이론의 개선을 지연시키기도 한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주로 과학 상대주의자들(과학적 지식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보는 사람들)의 주장인데, 그들은 변칙 현상들에 대한 기록이 누적되다가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매우 짧은 기간에 기존의 이론이 뒤집히는 방식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의 결과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때 이를 과학혁명(科學革命)이라고 하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모형이 오늘날 주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쿤/포퍼 논쟁> 책을 찾아 읽어보자.)

가설연역주의는 이론 검증 시도의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그 내용이 해당 분야의 과학자들 사이에 신속하게 공유되는 이상적인 상황에서만 성립하는데, 불완전한 현실에서는 그 분야의 권위자들(주로 연장자들)의 판단과 정보력에 맡겨지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그리고 연장자들이 부하 연구자들의 보고를 일일이 자신의 경험에 비춰 판단할 수 없기에, 과학계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정치판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정립된 이론을 보다 정교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극한의 조건에서 그 이론이 내세우는 가설을 반증할 수 있는 실험이 가능해야 하는데, 오늘날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실험을 설계하고 진행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가격대의 장비와 인력이 필요하다. 이유는 아래 인용구에서 말하는 대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린 얘기를 이것저것 했다. 갈릴레오와 뉴턴이 이를 바로잡았다. 그랬더니 아인슈타인이 다시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이제서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럭저럭 이해하게 되었다. 작은 것, 큰 것, 뜨거운 것, 차가운 것, 빠른 것, 무거운 것, 어두운 것, 난류(亂流), 시간의 관념을 제외하고 말이다. -와이너스미스 著 <쓸모 없어질 정도로 간추린 과학> 중에서

다시 말해, 과학기술을 주관하는 정부 부처를 가진 국가에서 평균적인 재력을 가진 국민이 직관에 따라 일차적으로 관측하거나 이차적인 정보에 근거하여 설계하고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비용이 드는 실험 중에서, 패러다임 전환을 일으킬 정도의 획기적인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자연)과학 지식보다 이를 활용하는 기술(공학)에 대한 정보가 일반인에게 더 쉽고 많이 전파되는 현재를 가리켜 과학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과학 지식이 이차, 삼차 지식의 지위로 밀려나는 동안 우리는 일차, 이차적인 검증조차 불가능한 주장에 대해 ‘카더라 통신’에 점점 더 의존하여 진위 여부를 결정짓는다.

“ChatGPT는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정보를 확인하세요.”

IT 기업이 몸을 사리려는 의도를 비치는 전형적인,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익숙해진 주의 문구다. 과연 우리는 중요한 정보를 따로 확인할 만한 지식 기반에 접근이 되는 상태일까? 수학기초론에서는 주어진 문제를 직접 해결하는 노력과 누군가가 제안한 해답이 맞는지 검증하는 노력(검산)을 완전히 별개로 다룬다. 이메일 계정에 로그인할 때 우리가 기억하는 비밀번호가 맞든 틀리든 이를 확인하는 시간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든 숫자와 문자 조합을 시도해 보면서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은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인공지능(AI) 챗봇이 얼마나 그럴싸한 답을 내놓든지 간에 이를 독립적으로 유도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미 갖고 있는 확실한 정보에 기반하여 검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이러한 거대언어모형(LLM) 기술은 우리 사회를 탈진실(脫眞實) 시대로 깊숙히 돌진시키는 가속페달이 될 것이다.

양창모 이학박사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