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하는 연금개혁, 여야 법안 살펴보니
정치에 대한 관심은 뜨거운데 정책에 대한 관심은 차갑게 식었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내란 우두머리 피의자가 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9일 현직 대통령 최초로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다. 급기야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에 반발하는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해 유리창과 집기를 부수며 난동을 부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헌법재판소는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 사건을 최우선으로 심리하며 속도를 내고 있다.
반면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한 정책 논의는 진전이 없는 상태다.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개혁의 동력이 비상계엄 사태 이후 사실상 실종됐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선 현상유지 수준을 벗어나 적극적인 정책 변화를 추진하기 어렵다. 특히 국민연금 개혁은 한시가 급한 사안이지만 실질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연금 재정의 부실은 커지고 미래 세대의 부담은 불어나고 있다.
여야 의원 발의한 법안 7건 계류
오늘 국회 복지위서 공청회 개최
보험료율 13%로 인상엔 공감대
소득대체율 둘러싸고 의견 대립
야당안, 최고 3000조 비용 추가
기재부 “재정 안정성 저해” 반대
여당은 “재정안정”, 야당은 “노후보장”
지난 14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 회의. 이날 3시간가량 진행된 회의가 끝날 무렵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박주민 위원장이 연금개혁에 대해 짧게 언급했다. 그는 “연금개혁은 미룰 수 없는 과제”라며 위원회 차원에서 공청회를 열겠다고 예고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미래 세대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는 더 급격한 개혁이 필요해져서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위원장이 언급한 보건복지위 공청회는 23일 열린다. 하지만 야당이 추진하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은 오히려 미래 세대의 부담을 키우고 연금 재정을 더욱 악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박 위원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야당 안은 일시적으로 국민연금의 고갈 시점을 늦추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막대한 연금 적자를 초래한다는 게 국회 예산정책처의 분석이다.
현재 국회 보건복지위에는 연금 보험료율 인상 등을 담은 국민연금법 개정안 일곱 건이 올라와 있다. 그중에 두 건은 여당인 국민의힘, 다섯 건은 야당인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다. 여당 안은 국민연금 재정 안정, 야당 안은 노후 소득보장 확대에 초점을 맞췄다.
27년간 동결된 보험료율 인상 시급
연금개혁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연금 보험료율의 인상이다.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는 소득의 9%를 연금 보험료로 낸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 이후 동결된 수치다. 벌써 27년째 ‘마의 10%’ 벽을 넘지 못했다. 보험료율이 낮을수록 연금 가입자가 현역 시절에 내는 돈은 줄어들지만 연금 재정의 부실은 깊어진다.
연금 보험료율 인상이 시급하다는 점에선 여야 정치권과 정부·전문가들이 대체로 공감한다. 여야 의원들이 낸 법안 일곱 건은 모두 연금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13%까지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연금 개혁안에서 제시한 수치도 13%였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은 지난 8일 새해 업무계획 사전 브리핑에서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살펴보면 보험료율을 13%로 인상하는 것에 대해선 모두가 같다. 공통적인 공감대가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도 최근 발표한 보고서(‘연금개혁 불씨 되살리기’)에서 “우선은 13% 수준이라도 보험료율 인상을 조속히 실행해 인상의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세부적인 내용은 차이가 있다. 의원들이 낸 법안은 해마다 조금씩 보험료율을 올리되 연간 인상 폭을 0.5%포인트로 하느냐와 0.3%포인트로 하느냐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정부 안은 둘 다 아니다. 대신에 정부는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중장년 세대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보험료율을 올리자고 제안했다. 세대별로 보험료율 인상 폭을 차등화하는 방안이다. 젊은 세대는 보험료 납입 기간이 많이 남았고 중장년 세대는 적게 남은 점을 고려해 세대별 형평성을 맞추자는 뜻을 담았다. 이런 정부 안은 박수영(국민의힘) 의원이 제출한 법안에 반영됐다.
노무현 정부 때는 소득대체율 인하
연금개혁의 두 번째 쟁점이자 난제 중의 난제는 소득대체율이다. 연금 가입 기간의 평균 소득과 비교해 노후에 받을 연금액이 얼마인가 나타내는 비율이다. 예컨대 소득대체율이 40%라면 연금 가입 기간 평균 소득의 40%를 노후에 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비율이 낮을수록 노후 소득보장 기능은 약해지지만 연금 적자를 줄이고 재정 고갈 시기를 늦추는 데는 유리해진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연금개혁을 통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40%까지 낮추기로 결정했다. 그전에 50%였던 연금 소득대체율을 매년 0.5%포인트씩 20년간 단계적으로 낮추는 방식이었다. 당시 국회에선 여야 합의로 이런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연금개혁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가 없었다면 어려운 일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개혁안에는 연금 보험료율을 12.9%까지 인상하는 방안도 있었지만 당시 야당(한나라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한국 대통령 통치 구술 사료집 5: 노무현 대통령』)에서 “(야당과의 협상이) 막힐 때마다 전 과정에 대통령이 개입했다”며 “절반이라도 재정 안정성을 도모하는 개혁이 된 거에 대해서 대통령은 굉장히 뿌듯해했다”고 전했다.
정부 안도 연금 재정 부실은 해결 못 해
올해 기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은 41.5%다. 이 비율은 2028년 40%까지 낮아질 예정이다. 향후 연금 소득대체율을 얼마로 할 것이냐에 대해선 여당 안과 야당 안, 정부 안이 제각각 다르다. 우선 주호영·박수영(국민의힘) 의원 안에는 소득대체율에 대한 내용이 없다. 현행 소득대체율을 그대로 유지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정부 안은 소폭 인상이다. 정부는 지난해 9월 발표에서 연금 소득대체율을 40%가 아닌 지난해 수준(42%)으로 동결하자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도 연금 재정의 부실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정부도 솔직히 인정했다. 당시 언론 브리핑에서 이기일 차관은 “소득대체율 40%로 하려면 보험료율은 19.7%, 소득대체율 42%로 하려면 보험료율은 20.7%가 돼야 한다”며 “부족한 돈은 결국 후세대에 미루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야당은 소득대체율의 대폭 인상을 주장한다. 한정애·이수진(민주당) 의원 안은 소득대체율을 45%까지, 김남희·전진숙(민주당) 의원 안과 김선민(조국혁신당) 의원 안은 소득대체율을 50%까지 올리는 내용을 담았다. 소득대체율 50%는 18년 전 노무현 정부의 연금개혁을 아예 없던 것으로 되돌리자는 얘기다.
소득대체율 인상=미래 세대 부담 증가
노후 소득보장이란 명분은 좋지만 문제는 누가 그 돈을 낼 것이냐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의원들이 낸 법안이 얼마나 큰 비용 증가로 이어지는지 추산한 결과(비용추계서)를 공개했다. 만일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면 적게는 2734조원(단계적 인상)에서 많게는 3086조원(한 번에 인상)이 추가로 필요하다. 소득대체율을 한 번에 45%로 올리면 이 비용은 1544조원이 된다. 올해부터 2093년까지 69년간 연금 재정의 추가 비용을 현재 가격(올해 물가수준을 기준으로 한 가격)으로 환산한 결과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언젠가 어른이 됐을 때 천문학적인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연금 보험료율 인상으로 연금 재정 수입이 일정 부분 늘어나는 효과는 있다. 그렇더라도 장기적으로 막대한 연금 적자는 피하기 어렵다. 만일 연금 보험료율은 단계적으로 13%까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한 번에 45%로 올리면(이수진 의원 안) 2093년 기준 연금 적자는 원래 예상했던 수준보다 1018조원이 줄어든다.
예산정책처는 “현행 제도(보험료율 9%, 소득대체율 40%)에 의한 누적적자보다 감소한다는 의미로, 적자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법안을 채택할 경우 2065년이면 연금 재정이 완전히 고갈된다. 올해 태어난 아기가 40세가 되는 시점에 연금 적립금이 한 푼도 남지 않고 소진된다는 계산이다.
만일 연금 보험료율은 단계적으로 13%까지 올리고 소득대체율은 한 번에 50%로 올리면(김남희 의원 안) 연금 재정의 적자는 훨씬 심각해진다. 예산정책처 추산에 따르면 2093년 기준 연금 적자는 원래 예상했던 수준보다 695조원 증가한다. 이 경우 연금 적립금이 완전히 고갈되는 시점은 2062년이다.
정부 예산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야당의 소득대체율 인상 요구에 반대 의견을 냈다. 국회 보건복지위 전문위원실이 작성한 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기재부는 “국민연금 재정의 안정성을 저해하므로 수용이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금 정책을 담당하는 복지부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