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남베트남 패망 50주년

2025-04-28

“월남 정부군이 투항을 명령받은 약 2시간 후인 30일 정오(한국시간 오후 1시)가 지나자 베트콩기를 흔들면서 공산군을 태운 10여대의 탱크가 환호하는 군중을 헤치면서 사이공 시내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 광장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 이로써 30년간에 걸친 월남전은 공산군의 승리로 끝장이 났다.” 1975년 4월30일 ‘월남 정부 무조건 항복’이란 제목으로 남베트남의 패망을 알리는 국내 신문 기사에선 당시 ‘아시아 반공전선’의 우방을 잃은 당혹감과 착잡함이 느껴진다.

베트남전쟁은 우리와 무관한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은 1964∼1973년 연병력 32만명의 대군을 파병했고 그중 5000명이 전사했다. 이 전쟁을 계기로 후진 농업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성장하는 ‘한강의 기적’ 발판을 만들었다. 북한도 참전했다. 전문가들은 연인원 2000∼1만명 이상을 파병한 것으로 추정한다. 북한은 이 시기 한반도에선 베트남전쟁의 제2 전선을 열겠다며 대남 도발을 강화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특수부대 남파가 많았던 이유다.

베트남은 종전 후 큰 변화가 있었다. 1979년 한때 후원국이던 중국과 국경을 놓고 일전을 벌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86년부턴 ‘도이모이’(쇄신) 슬로건 아래 경제, 사회사상에서의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반미 선봉국이 1992년 한국, 1995년 미국과 수교하며 구원(舊怨)을 털고 화해를 선택했다.

남베트남 패망은 베트남 통일을 의미한다. 베트남 현지에서는 요즘 날마다 남북통일 50년, 남부해방 50년 기념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베트남이 화해·개혁·개방을 통해 최빈국에서 신흥 공업국으로, 분쟁국에서 지역 맹주로 도약한 것을 자축하는 행사다. 베트남은 미·중 대결 속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베트남의 성공은 화해·개혁·개방을 하나로 섞어 평화와 번영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 북한에 시사점이 크다. 초기 답보 상태였던 도이모이 정책도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성공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했다. 국제관계에서 베트남 사례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클리셰를 다시 확인시켜주면서도, 결국 생존의 길은 개혁과 개방에 있음을 보여준다.

김청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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