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섬세한' 정유경의 신세계가 기대된다

2024-10-31

[서울=뉴스핌] 조민교 기자 = 어릴 적 내게 백화점이란 고객이 서두를까 봐 시간을 볼 수 있는 시계를 다 빼놓는 그런 삭막한 곳이었다. 비싸고 반짝거리는 물건이 많고 내 물건보다는 다른 사람 선물을 살 때 많이 가던 곳.

주머니 사정이 여의찮았던 대학생 때는 지하철과 연결된 백화점 지하 통로를 걸어갈 때도 눈치가 보였다.

사람들은 웬만하면 소비를 마음먹고 하지 않는다. 천원의 기적, 다이소가 흥행하는 이유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백화점은 점점 부담스러운 존재가 됐다.

고물가, 고금리 시대가 지속되면서 이 경향은 두드러졌다. 유통업계는 이제 싸거나, 편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시간을 들여 홈쇼핑부터 온라인, 오프라인까지 뒤져서도 자신 있을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팔거나, 아니면 클릭 한 번으로 결제부터 다음 날 배송까지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하게 하거나.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이 모든 말은 백화점이 설 곳이 줄어든다는 말과 똑같다. 백화점은 싸지도, 편하지도 않다. 이미 10년 전부터 '백화점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 흐름을 거슬러 간 사람이 있다. 정유경 회장이다. 2016년부터 2조원을 투입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증축과 리뉴얼을 진행했고, 대구, 김해, 하남점을 잇달아 오픈했다. 떨어지는 주식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셈이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이후 매출 3조원을 돌파하며 7년 연속 매출 1위 점포의 신화를 썼다.

왜 정 회장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마케팅 용어로 갈음할 수 있겠지만 그 섬세함이 주목된다.

정 회장의 섬세함이 돋보였던 건 '랜드마크 프로젝트'다. TV에 몇 번 보이지도 않던 연예인이 청담 빌딩을 샀단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각인된다는 건 그만큼이나 고부가가치의 일이다. 정 회장은 신세계를 이왕 알릴 거,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큰 백화점'으로 등재될 만큼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마케팅에 대한 섬세한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자신을 과신하지 않는 섬세함도 있다. 정 회장은 백화점 업계 최초로 데이터 전문가를 대거 채용해 VIP들을 분석했다고 한다.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데이터로는 너무나 확연했다. 2030 밀레니얼 세대의 명품 소비 현상을 잡아낸 정 회장은 이후 VIP 등급을 조정하는 등 수요층을 적극 공략했다.

마지막은 예술적인 섬세함이다. 똑같은 위치, 똑같은 가격의 식당이라도 왠지 그곳을 가고 싶은 마음을 공략했다. 정 회장은 백화점을 마치 미술관처럼 꾸민 공간 구성 등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우아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선사했다. 같은 물건을 판매한다면, 좀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공간에 가지 않을 이유가 있겠나.

앞으로 정유경의 신세계가 기대되는 이유다. 정 회장은 그동안 공식적인 노출이 거의 없어 '은둔의 경영자'로 불렸다. 그런 정 회장이 전날 그룹 인사를 통해 부회장을 뛰어넘어 회장으로 등판했다. 본인의 의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인사다. 본격적인 경영 역량을 보여주겠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섬세함을 가진 전략적인 사업가, 정유경의 신세계가 기대된다.

mkyo@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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