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낳은 여섯 남매의 자녀들은 할머니의 무릎에 모여 앉아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의 주요 레퍼토리는 6·25전쟁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동생들의 손을 붙잡고 서울을 떠나 오른 피란길의 기억이 밤마다 펼쳐졌다. 먹을 것을 나누어 준 낯모르는 이웃들, 첫아이를 출산한 정읍, 갓난아이를 안고 넘은 지리산, 부산에 도착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를 나는 듣고 또 들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언제나 당부였다. 혹여나 다시 전쟁이 나거들랑 눈에 띄는 행동을 삼가고, 서로를 찾지도 말아라. 전쟁 중에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고 전쟁이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며 세상을 떠난 가족과 이웃의 얼굴을 숱하게 기억하는 가족의 지침은 ‘가만히 있으라’였다.
지난 12월3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국회로 달려갔다. 국회에 군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화가 났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노동으로 일구는 이 사회를 언제든 난도질할 준비를 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이를 실행할 권한을 두었다는 사실이 화났다. 군인과 군용차, 헬기를 보았지만 참담할지언정 두렵지는 않았다. 그 총구가 실제 나를 향할 것이라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격언 속에 자랐어도 두려움 없이 국회에 달려갈 수 있었던 것, 그만큼이 우리가 지켜온 평화의 크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40여일이 지났다. 이제 나는 두렵다. 평화란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가 매일 새롭게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내란을 획책하기 위해 대통령이 국지전을 시도했다. 이것이 성공했더라면 한국의 전쟁이 가져올 세계적 여파와 폭력의 심도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대통령이 국민을 향해 결사 항전을 선포하고, 지지자들은 자경단을 꾸려 다른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태세에 나섰다. 서북청년단을 비롯한 반공주의 파시즘의 찌꺼기들이 부활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사건들이 미래 한국 사회에 어떤 상처를 남길 것인가 자문하며 나는 이제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막막하고 두려운 마음이 커질수록 광장에 간다. 광장에 서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는 이 나라에 크게 제 몫도, 빚도 없지만 이 나라를 고쳐서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이들이다. 지난 1월4일 서울에서 열린 집회에서 가수 최고은은 우리는 모두 어제의 얼굴로 내일을 살게 된다고 말했다. 살아온 나라가 아니라 살고 싶은 사회를 이야기하는 이들로부터 나는 우리가 미래에 가질 수 있는 얼굴을 엿본다. 지켜야 할 서로와 용기를 얻는다.
총칼로 얼룩진 과거의 얼굴을 저들과 함께 남겨두고 미래의 얼굴로 오늘을 살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목을 조르는 자가 대통령이라면, 두렵다고 맞서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