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객의 맥주병에 난자 당해 얼굴에 깊은 상처 남아
스캔들마저도 닮은꼴이었던 남진과 나훈아의 대결 구도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나훈아가 남진과 본격적으로 대결구도를 형성한 건 72년이었다. 정치계에서는 박정희-김대중이 대통령 자리를 놓고 경합하는 동안 나훈아는 생애의 걸작이자 한국 트로트의 금자탑으로 남은 '물레방아 도는데'(정두수 작사·박춘석 작곡)를 내놨고, 남진은 흥겨운 세미 트로트곡 '님과 함께'(고향 작사·남국인 작곡)를 발표하면서 격돌했다.
당시엔 시골 마을 구석까지 이들의 히트곡이 파고들었다.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오프라인 버전인 콩쿨 대회의 단골 레파토리는 남진과 나훈아의 노래였다. 소풍 때마다 초등학생들은 남진 흉내를 내면서 '님과 함께'를 불렀다. 연말이면 두 사람이 각 방송사의 가수왕 자리를 놓고 대립했고, 승자는 환호했으며 패자는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
이들의 라이벌구도가 절정을 이룬 것은 72년 소위 나훈아의 밤무대 피습사건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노래하던 나훈아가 괴한이 휘두른 맥주병에 맞아 얼굴에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나훈아 피습은 순식간에 남진의 사주하여 벌어진 사건으로 소문났다. 이때문에 양 측의 팬들까지 크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남진의 팬이던 취객의 우발적인 행동으로 결론났지만 지나친 라이벌의식이 불러온 사건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여하튼 이 사건으로 나훈아는 얼굴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두 스타의 스캔들 또한 궤를 같이한다. 남진은 동료가수 윤복희와의 결혼과 이혼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고, 조폭으로부터 칼을 맞아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나훈아는 자신보다 7살이나 많은 국민 여배우 김지미와의 결혼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나훈아가 김지미와 결혼한 76년을 기점으로 10년 가까이 이어진 이들의 라이벌 관계도 자연스럽게 청산되었다. 남진 역시 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 탄압을 받아 고향으로 낙향하면서 가수 활동을 접다시피 했다.
미디어가 만든 라이벌 구도였지만 두 사람의 성장 배경과 음악적 색깔은 사뭇 달랐다. 1946년생인 남진은 목포에서 신문사 회장, 국회의원을 지낸 부친 덕분에 어려움 없이 살았다. 요즘 말로 얘기하면 '엄친아'였다. 알각에서는 남진이 고생을 하지 않고 스타가 되는 바람에 노래에 애절함이나 간절함이 없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훈아는 노래 한 곡 한 곡에 혼을 실어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부모님과 등지면서 가수가 되겠다고 상경했기에 오로지 가수로서의 성공 만이 그를 구원할 수 있었다.
여하튼 라이벌로 신화를 썼던 이들의 생명력은 그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80년 이후 나훈아는 트로트 특유의 서정성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섞어 한국적 트로트를 완성해 나간다. 뒤집고 꺾는 다이내믹한 창법에 국악까지 가미하면서 잇달아 히트작을 내놓았다. 컴백작 '울긴 왜 울어'를 시작으로 '대동강 편지'(81년), '여자이니까'(82년), '사랑'(83년), '청춘을 돌려다오'(84년), '땡벌'(87년), '무시로'(88년), '건배'(89년), '영영'(90년)등 주옥 같은 히트곡으로 조용필과 더불어 80년대 가요계를 지배했다.
90년대 들어서도 나훈아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콘서트 무대를 휘저으면서 한국적 트로트계의 제왕임을 확인하곤 했다. 남진 역시 최근 들어 TV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이나 '나는 가수다'등을 통해 재발견되고 있다. 특히 임재범이 그의 히트곡 '빈잔'을 불러 새삼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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