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사법기관의 정족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4-10-15

‘군인·군무원·경찰공무원 기타 법률이 정하는 자가 전투·훈련 등 직무 집행과 관련하여 받은 손해에 대하여는 법률이 정하는 보상 외에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은 청구할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29조 제2항이다. 하위 법률에만 있어도 충분할 것 같은 내용이 헌법 조문으로 ‘격상’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5000명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국가가 지급하는 보상금을 받는 것이 전부였다. ‘정부의 잘못된 참전 결정으로, 또는 직속상관의 그릇된 작전 명령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국가배상법 2조 1항에 이러한 취지의 금지 규정이 명시돼 있었다. 월남전 전사자가 늘며 유족의 손배소 제기와 그에 따른 국가의 배상금 지출이 증가할 것을 우려한 정부가 재정적 부담을 최소화하고자 마련한 법률 조항이었다.

법조계와 법학계에서 위헌 의견이 제시됐다. 그들은 국가배상법 2조 1항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헌법 위반”이라는 주장을 폈다. 1970년 마침내 대법원이 위헌심사에 착수했다. 당시는 헌법재판소가 없었고 위헌법률 심판권은 대법원에 있었다. 청와대에 ‘대법관 다수가 현 국가배상법에 비판적이어서 위헌 판결이 나올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격분한 박정희 대통령은 정부와 여당에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조치가 법원조직법 개정이다. 기존에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의결 정족수가 ‘대법관 3분의2 이상 출석에 과반 찬성’이었는데 이를 ‘대법관 3분의2 이상 출석에 3분의2 찬성’으로 바꾼 것이다. 그 시절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해 대법관 16명으로 구성됐다. 종전 같으면 9명만 찬성하면 과반으로 위헌 판결을 내릴 수 있었는데 이제는 11명의 찬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누가 봐도 대법원의 위헌 판결 가능성을 아예 봉쇄하려는 의도라고 하겠다.

이듬해인 1971년 6월22일 마침내 운명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회의가 열렸다. 대법관들은 먼저 전원합의체 의결 정족수를 까다롭게 만든 개정 법원조직법 조항을 위헌 심사대에 올렸다. 결론은 ‘위헌’이었다. 헌법에는 위헌법률 심판의 정족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데, 하위 법률인 법원조직법으로 이를 규정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문제의 국가배상법 조항이 합헌인지 위헌인지를 놓고 표결에 들어갔다. 대법관 9명이 위헌, 7명은 합헌 의견을 냈다. 앞선 법원조직법 위헌 판결에 따라 전원합의체 의결 정족수는 ‘3분의2 이상’, 그러니까 11명에서 도로 ‘과반’, 곧 9명으로 낮춰진 상태였다. 이로써 국가배상법도 ‘위헌’ 판결이 내려졌다. 박 대통령이 분노하고 정부·여당도 충격을 받았으나 헌법의 최종 해석 권한이 대법원에 있는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박정희정부는 1972년 유신 개헌을 하며 해당 국가배상법 조항을 아예 헌법에 못박아 위헌 논란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14일 재판관 9명 전원일치로 ‘재판부는 재판관 7명 이상의 출석으로 사건을 심리한다’고 규정한 헌법재판소법 제23조 제1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앞서 국회 탄핵소추로 직무 수행이 중단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해당 조항을 상대로 낸 헌법소원 및 가처분 신청 중에서 일단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위원장 측은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재판관 심리 정족수를 7명으로 정한 것은 위헌이란 논리를 폈다. 오는 17일 재판관 3명이 후임자 없이 퇴임하는 가운데 남은 재판관 6명으로는 심리 정족수를 못 채워 이 위원장 탄핵심판을 비롯한 헌재 업무가 ‘올스톱’ 될 처지였다. 헌재는 ‘재판관이 언제든 7명보다 적어질 가능성이 있는 현 상황에서 심리 정족수를 7명으로 제한한 것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국민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헌법에는 없는 심리 정족수를 하위 법률인 헌재법에 명시한 것도 위헌 소지가 크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정족수가 핵심 쟁점이 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족수를 일종의 지렛대 삼아 헌재 기능의 마비를 막았다는 점에서 1971년의 그 역사적인 대법원 판결이 떠오른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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