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의 소지품을 곱게 챙긴 식당
저녁 장사 접고 북토크 온 지인들
일상속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이들
모두가 삶의 스승임을 깨닫는 나날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다. 좋은 스승이 계셨던가? 학교, 학원, 도서관, 박물관 등을 드나들며 배우고 익혔으나 나는 무지투성이라 배움에 목마르다. 작년 초엔 상형문자 읽는 법을 공부하다가 포기했고, 하반기엔 이집트 아인샴스대학교에 지원했으나 갈 수 없게 되었다. 올해도 배우고 싶은 게 많았지만, 건강부터 챙기려고 헬스장에 갔다. 어디서나 배울 게 있구나! 기본적인 기구이용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해서 등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오늘 같은 설 연휴에 찾아뵙고 싶은 스승이 있는가? 학업의 성취를 넘어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 용기 있게 자신을 발견해가는 이,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이, 이분들 모두가 나의 스승임을 깨닫는 나날들.
새 시집을 가지고 새해부터 북토크 행사하러 뛰어다니고 있는 요즘이다. 첫 번째 북토크는 1월 중순, 서울 강서구에 있는 ‘다시서점’에서 열렸다. 그 서점 대표님을 나는 주저 없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스승이라고 부르면 너무 무거우니까. 서울 서쪽 끝에 있는 작은 독립서점을 운영하는 그분은 대관비나 참가비를 받지 않고 행사를 추진하셨다. 물론 책을 살 때는 책값을 지불해야 한다. 책과 문학이 좋아서 자신이 선택한 일로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이들은 존경할 만한 문학적 스승이다. 나보다 어려도.
문제는 그날 북토크 이후에 발생했다. 밤 10시쯤 서점 근처 식당에 가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식사했다. 출판사 대표님이 고기와 술을 사서. 자정 무렵 귀가해보니 목에 둘렀던 모직 머플러가 없었다. 내가 실수로 식당 테이블 위에 놓아두고 온 것 같았다. 파리에서 열렸던 문학행사에 초청받아 갔을 때 프랑스 시인이 선물해준 귀한 물건이었다.
나는 이튿날 다시 식당으로 갔다. 찾을 수 없을지라도 찾으려는 노력은 해봐야지. 눈발이 쏟아져서 더 멀게 느껴졌다. 공항동 골목에 있는 그 식당에는 손님이 꽤 많았다. 불판 위에 돼지고기를 올리고 돌아서는 종업원에게 나는 머뭇머뭇 여쭈었다. “저는 어젯밤 여기 왔던 사람인데요. 혹시 두툼한 머플러 하나 보셨을까요?” 그는 커피 자판기 옆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비닐봉지를 내게 내밀었다. “이거 맞죠? 주인이 찾으러 오길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가 싱겁게 웃었다. “고기 구울 때 연기가 많이 나니까 목도리에 냄새 밸 것 같아 비닐봉지로 봉해놨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내가 잃어버릴 뻔한 물건을 찾은 것만 해도 다행인데, 세심하게 보관해준 그 사람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윤리나 배려라는 말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 자체가 몸에 밴 이웃들.
지난주에는 포항에 가서 북토크를 했다. 나는 책 팔러 다니는 장사처럼 분주한데,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영업사원의 심정을 경험할 수 있어서 값지게 여겨진다. 하지만 점점 걱정이 몰려왔다. 난생처음 포항에서 맞는 행사인데 썰렁하면 어쩌지? 북토크 사회를 보기로 한 박미경 시인이 내게 분홍빛 포스터를 보내준 이후로 마음이 막막했다. ‘누구나 명작을 쓰잖아요’라는 제목의 포스터 아래 내 시집과 얼굴 사진이 큼직하게 찍힌 홍보물을 책방수북 입구에 붙여둔다고 했다. 행사에 아무도 안 오면 어쩌지? 포항에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포항 책방수북까지 차로 1시간 거리에 해숙 언니네 분식점이 있다. 김밥과 떡볶이, 특히 들깨칼국수가 유명해서 외지인들이 줄 서는 식당을 20여년째 혼자 해나가고 있는 분. 매일 저녁밥을 그 분식점에서 무료로 해결하는 동네 어르신들이 계신다. 내가 물었던 적 있다. “언니, 이렇게 남들 챙기면 돈은 언제 벌어요?” “걱정 마. 퍼주고 망한 장사는 없는 법이야.” 그 언니가 놀랍게도 북토크에 참석하셨다. 서둘러 저녁 장사 마치고 그 동네 요양보호사 언니와 공사장 일하는 아저씨와 함께. 난생처음 문학 행사라서 어색하고 신기하다며 어깨를 잔뜩 움츠리셨다. 책방수북 대표님이 그 세 사람을 귀빈석에 모시고 VVIP에게만 드린다는 도자기미술품을 선물하셨다. 만나는 모두가 내 스승이다. 나는 오며 가는 보통의 일상에서 경이롭고 눈물겹게 배움의 길을 누리고 있다.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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