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어른

2025-01-30

얼마 전 ‘아는 청년’ 한 명이 결혼했다. 세상에서는 그를 ‘자립준비청년’이라 부르는데 인연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동네 아동복지시설에서 수녀님 한 분이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용건은 시설 청소년에게 인문학 공부를 시켜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마침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우리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첫 프로그램은 고전 서당이었다. ‘불우’ 청소년들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의 언어가 필요한데, 고전을 읽고 암송하는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둥벌거숭이 같은 10대 남학생들에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같은 논어 문장을 가르치고,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같은 성삼문 시조를 외우게 하는 일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아이들은 딴청을 부리거나 졸았다. 우리는 서당에 더 많은 교사를 투입하고, 더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그들과 소통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글이 아니라 몸을 쓰는 건 어떨까? 연극도 해보고, 아이돌 댄스도 함께 배웠다.

하지만 이런 좌충우돌로 희망의 인문학을 만들 수 있을까?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무력해진 나는 결국 손을 떼고 대신 아이들과 신체리듬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젊은 회원들이 나섰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나처럼 각 잡지 않고서도 얼렁뚱땅 아이들과 영화도 만들고 사진전도 열고, 음식도 만들어 팔았다. 그리고 드디어 <웃기엔 애매한>이라는 야릇한 제목의 영화 시사회가 공동체에서 열렸다.

영화 속 아이들은 우선 자신들이 겪는 독특하고도 일상적인 상황들을 재현했다. 학교에서 여럿이 담배를 피우다가 걸렸는데 시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자신만 가벼운 처벌을 받아 오히려 기분이 더러워진 일, 일괄 소등하는 오후 11시가 되면 마치 신데렐라처럼 여친과의 통화를 늘 강제 종료해야 하는 안타까움, 시설에서 산다는 걸 들키기 싫어 집에 오겠다는 같은 반 친구들을 어렵게 따돌리는 난감함 등이 펼쳐졌다. 또 영화 속에서 다섯 주인공은 난생처음 살아온 이야기를 나눈다. 갓난아이일 때 입소해서 시설 이외의 기억이 전혀 없는 경우, 할아버지와 살다가 시설에 맡겨진 경우, 이혼한 아버지가 매일 술에 절어 폭력을 일삼자 교사가 신고해 쉼터를 통해 시설로 들어온 경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재혼하고 이후 고모네와 할머니네를 전전하다 결국 시설에 입소한 경우, 부모 이혼 이후 아버지와 여관에서 살다 아버지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쉼터로 갔다가 출소한 아버지와 다시 합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설로 들어온 경우. 하나같이 애달픈 열다섯 생애들이었다.

얼 쇼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울고 웃으면서 서로의 삶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응원하는 하나의 ‘공적 세계’가 만들어졌다. 어쩌면 희망의 공동체! 그날 이후 난 어깨에서 완전히 힘을 뺐다. 그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계몽적 열정도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편안하게 공동체를 들락거리고 나는 그런 아이들에게 종종 잔소리하는 시간들이 무심히 흘렀다. 몇 년 후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시에 시설에서도 퇴소했다. 하지만 아이들과 우리의 관계는 느슨하게나마 이어져갔다.

결혼식장은 달뜬 열기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과자를 먹던 아이는 이제 새신랑이 되어 신부를 향한 세레나데를, ‘삑사리’를 내면서까지 목청껏 부르고 있다. 축하 편지는 시설에서 함께 자란 친동생이 낭독했다. 나는 넉넉한 축의금을 준비했고, 식이 끝난 후 ‘지인’ 자격으로 사진도 찍고, 밥도 먹은 후 돌아왔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 냉랭한 타인도 아니고, 펄펄 끓는 정념의 관계도 아닌, ‘아는 청년’- ‘아는 어른’의 부드럽고 따뜻한 관계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갑자기 그 청년들의 ‘아는 어른’인 게 뿌듯하게 느껴졌다. 설 지나면 새신랑에게 연락해서 집들이 한번 하라고 졸라야겠다. 신혼집엔 어떤 선물을 사갈까? 목하 즐거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인문학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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