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는 1947년에 ‘나의 소원’을 쓰면서, 이것은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을 위함이라고 말했는데, 백범이 꿈꾼 진정한 독립은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는 일이었다. ‘나의 소원’에는 요즘 너도나도 입에 올리는 “아름다운 나라”와 “높은 문화의 힘”이 언급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라는 장이 포함돼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로 시작되는 이 장에서 백범은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회자되는 현실의 맥락에 최근 전 세계적으로 메가 히트를 치고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있다. 뉴스를 통해 접한 바로는 이 애니메이션이 외국 관광객까지 불러들이고 있다니 과연 ‘문화의 힘’이 세긴 세다.
K컬처 환호 속 기초예술은 ‘홀대’
이른바 K컬처가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것은 꽤 된 일이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를 열광시키는 일은 국민으로서 기분 나쁠 일이 아니다. 도리어 긴장의 끈을 놓치면 문을 두드리는 국수주의를 경계해야 할 정도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꼭 긍정적으로 발현되는 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인들의 눈길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K컬처와는 달리 정작 외면받는 우리의 기초 문화예술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들어서야 순수 기초예술을 언급했지, 그동안 내내 돈 되는 문화 ‘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해왔으며 그에 걸맞은 사람들을 중용했다. 유튜브로 우연히 시청한 어느 국무회의에서는 순수 기초예술에 대한 질의가 영화로, 그다음은 먹방으로, 그다음은 치킨벨트로 이야기가 번져가는 슬픈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어쨌든 대통령이 순수 기초예술이 뒷받침돼야 문화강국이 지속된다고 강조했으니 기다려보자는 낙관론이 주위에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이 대통령 말대로 펼쳐질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실감하는 기초 문화예술의 상황이 너무 안 좋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각 자치단체 산하 문화재단의 관료화가 너무 깊게 진행되었다는 소리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창작지원 정책이 이미 ‘스타 프로젝트’로 변질됐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가 하면, 지난 9월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발표한 문학나눔 지원도서 사업 진행이 눈에 띄게 더뎌졌는데도 그것을 어디에서도 관리, 감독하지 않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무엇보다도 책 내서 빚 먹고 산다는 자조가 퍼진 출판계는 이미 고사 상태다. 사태가 이러한데도 정작 정부나 정치권에서는 ‘아름다운 나라’ 타령만 하고 있다.
그런데 백범이 말한 ‘아름다운 나라’는 대중문화 수출로 돈 잘 버는 나라를 뜻하는 게 아님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도리어 백범은 지나친 물질적 부를 경계하기까지 했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으며 나아가 인의와 자비, 사랑의 마음만 있으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백범의 소원은 돈이 아닌 ‘자유’
백범이 말한 “높은 문화의 힘”은 비록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우리에게는 세계사를 바꿀 문화적 잠재력이 풍부함을 믿자는 독려의 말이면서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의 오늘날 형편이 초라한 것을 보고 자굴지심을 발하여 우리가 세우는 나라가 그처럼 위대한 일을 할 것을 의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 모욕하는 일이다”라고 쓰기도 했다. 백범이 말한 ‘아름다운 나라’는 돈 되는 문화 산업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고유의 문화를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를 돕는 일”을 하는 나라이며 사실 이것이 문화의 참된 역할이기도 한 것이다.
과연 우리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것은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현실이 자본주의임을 감안하면 대중문화의 교역이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예술의 기초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문화 산업이 생산하는 문화 상품만의 소비를 장려하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나 정부의 책무라고 보기 어렵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도 지나친 물질 과잉과 그것을 지키자는 그릇된 애국주의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로 상징되는 건강한 비판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그의 제자 플라톤이 드디어 철인 왕도 정치를 주장하게 되었는데, 플라톤을 전적으로 그리 볼 수는 없지만, 어쨌든 사상의 반동은 ‘지나친’ 물질주의를 먹고 자라기도 한다. 오늘날은 특히 인공지능(AI)이 그것을 성찰할 정신의 역할을 좀먹고 있다. AI의 흐름을 현재로서는 막는 게 쉽지 않다면, 그에 맞서는 “높은 문화의 힘”을 길러야 이만한 민주주의라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문화의 힘”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쉽게 골다공증에 걸리고 만다. 백범이 말한 ‘아름다운 나라’는 정신적 방만과 나태를 불러오는 물질의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가 넘치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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