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알못’인 기자가 저장대(浙江大)를 알게 된 건 2011년, 국내 대학의 경쟁력을 다룬 기사를 준비할 때다. 기초자료 삼아 영국 대학평가기관 타임즈고등교육(THE)이 발표한 세계 1~200위 대학을 나라별로 정리했는데, 중국(홍콩 별도)에선 베이징대·중국과학기술대·칭화대·난징대·중산대에 이어 이름 올린 곳이 바로 저장대(당시 197위)였다. 덕분에 중국판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9개 대학(구교연맹) 중 한 곳으로, ‘진실을 찾고 혁신을 추구한다’는 인상적인 모토의 공학 분야 명문대란 걸 알게 됐다.
기자의 호기심은 거기서 멈췄는데, 그땐 관심이 대학의 면면보다 ‘스코어’에 쏠렸던 탓이다. 그해 200위 내 국내 대학은 포스텍·KAIST·서울대·연세대 등 4곳이었다. 중국과 한국이 ‘6대 4’인 셈이었는데, 기자는 “경제력·인구를 고려하면 중국 대학도 한국만큼이나 신통치 않네” 생각하고 말았다.
세계 일류 목표로 선택·집중 30년
저장대,‘항저우의 스탠퍼드’로 커
뒷걸음 한국 대학 구할 대안 시급
한참을 헛짚었다. 막 기지개를 켜던 중국 대학을 과소평가했다. 지난달 초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창업자 량원펑이 저장대 출신이란 뉴스를 보고 THE 랭킹을 다시 살폈다. 지난해 저장대는 세계 47위로 평가됐다. 15년도 안돼 150여 계단을 뛰어올라, ‘한국 1위’ 서울대(62위)보다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뿐만 아니다. 그새 중국의 ‘국대’ 칭화대(12위)·베이징(13위)은 아시아 선두 대학이 됐고, 200위 내 중국 대학은 홍콩(5곳)을 빼고도 12곳으로 늘었다. 반면 한국 대학은 6곳에 그쳤다. 연구 역량에 중점 둔 랭킹(ARWU)에선 격차가 더 벌어졌다. 1~100위 중 중국은 14곳(저장대는 27위), 한국은 단 1곳(서울대·86위)이다.
더 놀라웠던 건 국내에선 구호에 그치는 산학연 협력, 맞춤형 인재양성이 중국엔 이미 정착했다는 점이다. 저장대는 2018년 중국 최초로 학부에 AI전공을 개설했는데, 딥시크 엔지니어 40%가 이곳 졸업자로 알려졌다. 저장대 컴퓨터학과를 졸업한 석·박사생의 30% 이상이 대학 소재지 항저우에서 창업 활동 중이다. 딥시크와 함께 ‘항저우 6소룡’(유망 스타트업)으로 불리는 로봇제조사 딥로보틱스의 창업자, 3D프린팅업체 매니코어의 창업자 모두 저장대 출신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와 실리콘밸리처럼 저장대와 항저우의 AI생태계, 중국 대학과 차이나테크가 동반 성장 중이다.
사실 중국도 한국처럼 서구에 비해 대학의 역사가 길지 않다. 베이징대·저장대 등 명문대도 대부분 19세기 말, 20세기 초 설립됐다. 특히 문화대혁명(1966~76년) 때 지식인 탄압의 광풍 속에 치명상을 입었다. 80년대 개혁·개방 이후 다시 출발선에 돌아온 셈인데, 이후 30~40년 만에 미국·유럽·일본을 따라잡은 거다.
이 같은 중국의 대학 굴기는 당과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1991년 덩샤오핑은 21세기까지 세계 일류 수준 대학을 100곳 육성한다는 ‘211공정’을 선언했다. 뒤를 이은 장쩌민은 저장대 등 구교연맹 등을 중심으로 재정수입 1%를 투자하는 ‘985공정’을 천명했다.
시진핑 주석도 211·985공정을 계승해 40여 개 대를 중점 지원하는 ‘쌍일류(세계일류대학·일류학과 건설)’ 정책을 추진 중이다. 지도자가 바뀌고 대내외적 환경이 변해도 세계 일류란 목표를 지키면서 될성싶은 대학에 예산 및 정책 지원을 몰아주는 ‘선택과 집중’을 이어갔다.
중국의 대학 혁신 시기, 한국 대학은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다. 정부가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연구력 향상(BK21, WCU), 산학협력(LINC, CO-OP), 교육 강화(ACE, CK, PRIME)를 목표로, 그럴듯한(?) 영어 약칭의 지원 사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돈을 부을 때만 ‘반짝’ 했을 뿐 체질 개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권이 바뀌면 사업도 변했고, 형평성·공정성·지역균형 등을 이유로 지원 대상과 목표가 바뀌었다. 특히 2010년대 이후 정치권과 정부의 관심이 표심과 직결된 ‘반값 등록금’(국가장학금 확대+등록금 동결)에 쏠리면서 재정난에 시달린 상당수 대학이 연구력·교육 질 향상 대신 생존을 위한 버티기에 급급하고 있다.
지난달 말 중국 정부는 저장대의 두장펑 총장을 교육부 부부장(차관)에 임명했다. 저장대를 ‘항저우의 스탠퍼드’로 키운 인물을 중용해 대학 혁신을 확산시키려는 포석일 테다. 부러워만 할 일이 아니다. 하루빨리 빈사 상태에 놓인 국내 대학을 구출할 대안을 찾아야 한다. 더 늦는다면 한국 대학은 국가·사회를 선도하는 연구, 미래 인재 양성이라는 고등교육기관 본연의 모습을 영영 되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