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경향신문은 오는 18일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미선 재판관의 퇴임 이후 벌어질 헌재의 재판관 공백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헌법재판관 정원은 9명인데 현재 8명뿐이고 이 중 대통령 지명 몫인 문 권한대행, 이 재판관 2명이 퇴임해 ‘6인 체제’가 되면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는 법조계 안팎의 우려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이미 국회가 선출한 마은혁 재판관을 신속히 임명해 ‘7인 체제’라도 만들어야 헌재의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도 담았다. 이 기사에는 문 권한대행, 이 재판관의 후임은 ‘당연히’ 오는 6월3일 선출될 차기 대통령이 임명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같은 날 한국일보도 비슷한 취지의 기사(열흘 뒤엔 다시 ‘6인 체제’…‘헌재 공백’ 반복 언제까지)를 내보냈다. 마은혁 재판관이 임명돼 7인 체제가 돼도 주요 사건 심리·선고가 쉽지 않으니 이참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후임재판관 임명 때까지 기존 재판관의 임기를 연장하는 독일, 예비재판관을 두는 오스트리아의 사례도 소개했다. 역시나 한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의 재판관을 임명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쓴 기사였다.
온라인에 먼저 공개된 기사가 지면에 실려 각지로 배달된 8일 오전, 조금 과장하면 ‘신문의 잉크도 마르지 않았을 때’ 한 권한대행은 그동안 기를 쓰고 거부하던 마 재판관을 임명하고,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로 이완규 법제처장과 함상훈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명했다. 한 권한대행은 지난해 12월26일 긴급 대국민 담화에서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 3명의 임명을 보류하면서 ‘여야 합의’를 임명 조건으로 내걸었다. 또 “대통령 권한대행은 나라가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안정적인 국정 운영에 전념하되, 헌법기관 임명을 포함한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석 달 넘게 지나도록 한 권한대행이 내건 조건 중 달라진 것은 없다. 마 재판관 임명에 국민의힘이 찬성하지도 않았고,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정신’이 변하지도 않았다.
한 권한대행이 대통령 몫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지명한 것은 위헌 여부까지 따질 일이 아니다. 자신이 지난해 12월에 한 말을 떠올려보기만 해도 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행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법 기술자’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의 비극은 이런 사람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 민주적 체제의 허점은 이런 사람도 절차를 지키지 않고는 끌어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선의’를 믿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성선설을 신봉하기보다는 선의를 믿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들, 그중에서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악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삶을 온전히 꾸려가기 어렵다. 그래서 웬만한 사건은 ‘사정이 있겠지’라며 이해부터 해보려고 했다. 한 권한대행의 이번 행태는 나의 오랜 가치관을 통째로 흔드는 일이다.
이참에 검찰의 사례도 다시 돌아보게 됐다. 심우정 검찰총장은 지난 1월26일 윤석열 전 대통령을 기소하기 전에 전국 고·지검장 회의를 열었다. 같은 달 23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로부터 윤 전 대통령 사건을 넘겨받아 보완 수사를 위해 구속기간 연장을 두 차례 신청했지만 법원이 모두 불허했다. 구속기한 만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날 3시간 가까이 회의를 한 뒤 저녁이 되어서야 기소했다. 이날의 늦은 기소는 결국 지난 3월7일 법원이 윤 전 대통령 석방을 결정하는 빌미가 됐다. 그리고 검찰은 법원의 이런 결정에 즉시항고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 석방을 지휘했다.
지난달 발생한 영남지역 대형 산불은 사상 최대·최악의 피해를 기록했다. 천신만고 끝에 대부분 진화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낙엽 아래 아직도 ‘잔불’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 잔불은 바람만 불면 언제든지 다시 큰불을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주불 못지않게 잔불을 찾아 끄는 데도 공을 들여야 한다.
한국사회도 마찬가지다. 윤 전 대통령이 시도한 사실상의 내란은 지난 4월4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으로 진압됐다. 그러나 여전히 잔불이 남아 있다. 한 권한대행의 행태는 나를 비롯한 시민들이 이를 다시 상기하도록 만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