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기업들이 자사 임원들에게 지급하는 보수에 대한 정보 제공이 글로벌 스탠다드와 비교해 크게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임원들에게 지급하는 보수가 수십억 원에 달하면서도 구체적인 이유가 제공되지 않자 국민연금공단은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 안건을 올린 기업 두 곳 중 한 곳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일부 투자자들은 회사를 상대로 주주 대표 소송까지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증시 밸류업을 위해서는 해외의 세이온페이(say-on-pay) 제도 도입 등을 통해 주주 권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30일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내역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지난 28일까지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직접 투자한 60개 기업 중 30개 기업의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 안건을 반대했다. 기업들은 매년 정기 주총 때마다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 안건을 올려 그 해 회사 임원들에게 지급할 총 보수 한도를 확정하고 이를 근거로 임원들에게 보수를 지급한다. 국민연금은 안건 반대 이유에 대해 “보수한도 수준이 보수 금액에 비춰 과다하거나, 보수한도 수준 및 보수 금액이 경영 성과 등에 비춰 과다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으로부터 임원 보수가 과도하다고 지적 받은 명단에는 SK하이닉스(000660), 한국금융지주(071050), 삼성전자(005930), LG화학(051910) 등 국내 증시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다수 이름을 올렸다. 주목할 점은 한국금융지주와 LG화학은 지난해와 이사 보수한도가 동일하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오히려 한도를 삭감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지난해 보수한도를 430억 원으로 설정해 11명의 이사들에게 총 215억 원을 지급했고, 올 보수한도는 70억 원 줄인 360억 원으로 제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보수 한도를 삭감했지만 국민연금은 여전히 삼성전자의 임원 보수가 적절하게 책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들 기업의 임원 보수가 정말 과도하냐 아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 ‘정보가 없어 알 수 없다’에 가깝다. 삼성전자의 경우를 살펴보면 삼성전자는 주총 30일 전 주총 소집공고 공시를 통해 이사의 보수한도 승인 안건이 주총 안건으로 올라간다고 알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지난해 이사의 수, 지급 보수 총액, 올해 이사의 수, 지급 보수 한도액 등을 단순 표기한 수준이었다. 주총 8일 전 공시된 사업보고서에는 지난해 임원 보수 내역이 담겨있었으나 이 역시 보수 산정 기준에 대해서는 “임원 처우 규정에 따라 직급, 위임업무의 성격, 위임업무 수행결과 등을 고려해 결정했다”고 간략히 기재했다.

이동섭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실장은 이달 13일 금융감독원 등이 주최한 거버넌스 토론회에서 “해외와 비교할 때 공시 수준이 열악하다”며 “(국내 기업의 안건 설명엔) 임원 보수 총액은 나오는데 어떤 평가 항목이 있고, 어떤 평가를 받아 얼마를 줄 수 있다는 등의 아무런 계산이 없다”고 지적했다.
미국 증시 시가총액 1위 애플과 비교하면 국내 기업의 불성실한 정보 제공 실태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국 전자공시시스템(EDGAR)에 따르면 애플은 올 정기 주총 46일 전인 1월 10일에 위임장권유신고서(Proxy Statement)를 공시했다. 애플은 총 104쪽 분량의 신고서에서 임원 보상과 관련한 내용에만 26쪽을 할애했다. 신고서에는 팀 쿡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한 주요 임원들의 보상 수준이 엔비디아, 인텔, 아마존 등 비교기업 대비 어느 수준인지, 이들의 경영 전략과 재무 성과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등이 나타나 있다. 또 주요 임원들이 3개년 동안 받은 보상 수준이 어떠했는지, 이들이 받은 보상이 일반 주주들의 이익, 회사 순이익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등도 자세히 명기했다. 주주들은 이를 통해 올해 애플 임원들이 어느 정도의 보상을 받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기업이 임원 보수 산정 기준을 구체화하고 판단 근거를 제시할 수 있도록 세이온페이 같은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2003년 영국에서 최초로 시행한 세이온페이는 임원 보수계획을 주총서 주주에게 설명하고 미래 보수 정책의 경우 구속력 있는 표결에 부치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매년 주총서 임원 보수 지급 현황을 설명하도록 하고 미국은 최소 3년에 한번 경영진 급여를 주총에서 심의받아야 한다. 2023년 팀 쿡 CEO가 연봉을 40% 자진 삭감한 것도 세이온페이 투표의 찬성률이 64%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이창민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법(제388조)은 ‘이사의 보수는 정관에 그 액을 정하지 아니한 때에는 주주총회의 결의로 이를 정한다’고만 명시하고 있다”며 “보수 보고서에 포함해야 할 내용을 시행령으로 정하는 식의 한국형 세이온페이 도입이 어렵지 않음에도 2013년 개별임원보수공시 제도 이후 10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건 감독 당국의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요 선진국에 비해 국내 기업들의 임원 보수 공시 수준이 빈약하다보니 이를 둘러싼 회사와 일반 주주들 간 갈등은 소송으로까지 번지는 형국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주주행동 플랫폼 액트를 통해 모인 소액주주들과 26일 DB그룹의 김준기 창업회장, 김남호 회장 등을 상대로 238억 원을 배상하도록하는 DB하이텍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이 DB하이텍의 미등기임원으로서 받는 보수가 과도하다는 이유에서다. 김 창업회장과 김 회장은 2021년부터 지난해까지 총 238억 원을 보수로 받았는데, 이는 등기이사 중 사내이사 총 보수(73억 원)의 3배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