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왕(태종)이 이르기를 ‘대실의 서쪽에 별묘를 세우고, 칭호는 마땅히 영녕전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조종과 자손이 함께 편안하리라’라는 뜻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종묘의 부속건물인 영녕전은 세종 때인 1421년 후손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종묘는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인데요. 조상들의 안식을 위한 공간인 만큼 조선 시대 내내 신성한 장소였고, 현대에는 특유의 고요함과 엄숙함으로 ‘동양의 파르테논’이라는 평가까지 나오는 곳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문화적 자긍심으로 아껴 마지않을 ‘성역(聖域)’인 셈이죠.
그런데 김건희 여사가 윤석열 정부 임기 중 최소 2차례 종묘를 드나든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평소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공간을 ‘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의혹도 제기됐고요. 종묘뿐만이 아닙니다. 김 여사는 윤 전 대통령과 함께 경복궁·창덕궁·덕수궁 등 궁궐도 수시로 찾았습니다. 왜 문제일까요? 점선면이 정리했습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임기 중 종묘와 궁을 찾은 횟수는 총 11회에 달합니다. 국가유산청이 김교흥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궁능유적본부 전 대통령 내외 방문’ 자료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 부부는 동반으로, 또는 홀로 2023년 1월23일 덕수궁 석조전, 2월23일 창덕궁과 후원, 3월5일과 9월12일 경복궁, 10월4일 종묘를 찾았습니다. 지난해에는 5월23일과 28일 창덕궁 후원, 6월4일 경회루, 9월3일 종묘, 10월1일 경복궁, 10월24일 흥복전 등을 방문했습니다.

선(맥락들): 제한구역도 ‘불쑥’, 용상도 앉아
왜 문제일까요? 먼저 관람에 대한 행정규칙을 위반했다는 의혹이 거론됩니다. ‘궁·능 관람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유적을 사용하려면 궁능유적본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요. 지난해 9월 종묘 차담회 당시 궁능유적본부는 김건희 여사 방문 일정을 통보받고 이 규정의 예외인 ‘국가원수 방문 등 부대행사’ 조항에 따라 사용을 허가했습니다. 그러나 김 여사는 국가원수가 아니고, 종묘 차담회도 사적 이용에 가까워 허가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궁능유적본부는 지난해 12월 결국 사과했습니다.
김건희 여사의 공무원 등에 대한 직권남용 혐의 여부도 수사 중입니다. 직권남용이란 쉽게 말하면 ‘월권’인데요. 지난 9월 김건희 특검팀은 종묘 차담회 관련 ‘김 여사가 대통령의 지위 및 대통령실 자원을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는 의혹’을 수사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종묘 차담회에 김 여사가 코바나콘텐츠 운영 당시 전시회를 열었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아들, 딸과 동행했다는 점이 사적 이용의 근거로 거론됩니다.
공무도 아닌데 제한구역까지 들어간 점을 두고 특혜라는 지적도 나옵니다. 2023년 3월5일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의 경복궁 방문은 사전 연락 없이 갑작스럽게 이뤄졌는데요. 평소엔 닫혀있는 경회루 2층과 건청궁을 구경했습니다. 김건희 여사는 경복궁 휴궁일인 2023년 9월12일에는 경복궁 근정전 내부로 들어가 어좌(용상)에 앉았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종묘 차담회 때는 신실(왕과 왕비 등 죽은 사람의 위패가 있는 곳)까지 열었고요.
해당 건물들의 관람이 평소 제한되는 건 하나같이 역사적 가치가 크기 때문입니다. 국보 경회루는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가장 큰 전통 목조 건축물이고, 건청궁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생활 공간이자 명성황후가 시해된 비극의 역사가 서린 장소입니다. 김건희 여사 방문 때 연 종묘 영녕전의 1신실은, 종묘에서도 가장 웃어른인 목조(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의 위패가 모셔진 곳입니다.
김건희 여사는 차담회도 여러 번 실시했는데요. 2023년 10월 비공개 종묘 방문에서는 종묘제례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연습하고 대기하는 공간인 소악공청에서 차담회를 열었고, 지난해 9월 종묘 망묘루(왕이 제사시 찾는 곳), 10월 경복궁 흥복전(왕의 외교관 접견장)에서도 차담회를 했습니다.

면(관점들): 문화유산 활용, 공론화 거쳐 신중해야
문화유산에서의 행사는 과거에도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2004년 국제검사협회 경회루 만찬, 2005년 세계신문협회와 세계철강협회의 창경궁 명정전 만찬 등인데요. 술과 식·음료, 담배가 반입돼 문화유산 보호에 소홀했던 것 아니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장이었던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번 김건희 여사 논란에 대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유산의 활용을 무조건 막자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적 전통과 가치를 알리는 데 문화유산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4년 방한 당시 경복궁 근정전 내부를 둘러본 뒤 “아름답다”고 극찬했는데요.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태도가 느껴졌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논란은 없었고요. 이처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문화유산의 공적 활용은 오히려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만합니다.
문화유산들의 가치는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과 기원의 유구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종묘에서 실시되는 제례악은 예법의 정교함과 엄숙함을 인정받아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고요. 경복궁은 왕의 즉위 등 중요 의식이 치러진 옛 영광과 일제강점기 일장기가 걸린 비극이 교차하는 상징적 공간입니다. 장소의 역사성과 이에 대한 존중 역시 가치의 일부인 셈입니다. 이를 가볍게 여기고 행동을 삼가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건 국격을 스스로 훼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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