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는 어디로 가시는가

2025-05-21

남극에도 꽃이 핀다. 남극좀새풀과 남극개미자리. 남극에 여름이 오면 두터운 눈밭 사이로 식물의 숨구멍이 열리고, 이끼들이 내뿜는 산소로 아지랑이가 일던 시간을 잊지 못한다. 그 혹독한 추위를 맨몸으로 이겨내다니. 태양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니. 식물에 대해 경외와 함께, 나까지 더불어 우주의 존재라 여기게 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꽃처럼 피어난 구슬이끼의 포자체는 얼마나 영롱하던지.

남극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꽃을 피워올려도 되는 순간. 정확한 타이밍에 꽃을 피우고 포자를 날려 보내는 것. 타고난 시간 감각. 수년간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깔따구가 반짝 날아올라 알을 까는 시기도 마찬가지다. 여름이 왔나보다 섣불리 알을 깨고 나왔다가는 얼어 죽고 말 일. 충분히 따뜻해졌을 때, 갑작스러운 기온 변화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일 때, 딱 그 때에 맞추어 알을 까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산다.

자연은 시간 감각에 생존 달려

섣불리 꽃 피었다간 얼어죽어

제철, 터전 잃고 떠나는 동식물

모두 사라지면 인간은 어디로

그런데 왜 우리의 봄꽃들은 점점 시간 감각을 잃어가고 있나. 산수유 피면 봄이 오려나 보다, 개나리 진달래 피면 봄인가 보다, 목련 지고 벚꽃, 라일락 향기 가고 아카시아 향기 바람에 묻어오면 여름이 멀지 않았구나 했는데. 순서도 안 지키고 시간차도 없이 일제히 나대듯이 피어오르는 걸까. 4월에 폭설은 또 어인 일이며, 그래서 배꽃 사과꽃 다 떨어졌다 하니, 올해도 사과 먹기는 글렀다.

아카시아 개화 시기가 빨라졌으니 꿀벌의 시간도 앞당겨져야 마땅하거늘. 꿀벌이 알에서부터 성충이 되어 꿀을 채집할 수 있을 때까지 필요한 시간은 한 달. 꿀벌들은 아카시아가 이리 빨리 피어날 줄 짐작하고 있었을까? 메뚜기도 한철 꿀도 한철인데. 아카시아 지기 전에 꿀벌들이 움직일 수 있으려나.

제철이란 단어가 무색하다. 언제부턴가 딸기는 겨울이 제철이고, 봄 제철 과일은 참외가 되었다. 개화 시기도 안 지난 블루베리가 지금 한창이다. 봄 도다리 가을 낙지 봄 주꾸미 가을 전어. 네 글자로 딱딱 떨어지던 제철 해산물은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겨울 제철 새조개는 지난해 구경도 못 해봤다. 말 그대로 씨가 말라서. 폭염으로 씨가 녹아버려서. 지난해 고수온으로 폐사한 홍합이 3억 마리 굴은 10억 마리 이상이라고 한다.

우리의 대표 생선이었던 명태가 잡히지 않은 지는 오래다. 더 이상 잡히지 않는다. 그 자리를 오징어가 대체했지만 오징어가 아니라 금징어라 불린다. 오징어 씨가 마르는 사이 제주 바다에서는 딱총새우류 같은 열대 어종이 자리를 잡았고, 동중국해에 살던 해파리들이 남해를 거쳐 동해까지 올라왔다.

그 많던 명태는, 그 많던 오징어는, 다 어디로 갔나.

지난해 북극해에서 오징어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어린 오징어는 물론이고 어른 오징어까지. 해류를 따라 어쩌다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북극을 산란지이자 서식지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시베리아를 지나 북극해까지. 더 차가운 곳으로의 피난 행렬은 모든 대륙과 모든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중해 대구는 북쪽으로 400㎞ 이상, 10년에 3.6m씩 더 깊은 바다로 옮겨갔다. 베링해에서 사라진 대구들은 이제 북극해까지 가야 볼 수 있다. 바닷속 아주 작은 규조류부터 고래에 이르기까지. 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길을 찾고 있다.

바다가 따뜻해질수록, 인간들이 바다에서 물고기를 남획하면 할수록, 바다 생물들은 더 빨리 달아날 것이다. 그나마 바다 생물들은 더 깊은 바다로 극지로 도망갈 수 있겠지만, 육지의 동식물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제 사과는 경북과 충북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재배된다. 제주도에서 키우던 키위는 우리나라 최북단 강원 고성지역으로 북상했다. 사과 복숭아 포도 같은 온대 과수에서 아열대 과수로 작물지도도 바뀌었다. 파파야, 애플망고, 한라봉 레스향, 패션프루트. 얼마 지나지 않아 봄 파파야 가을 망고로 네 박자 가사가 바뀔지도 모르겠다.

지구상에 가장 추운 곳 남극은 좀 괜찮으려나. 젠투펭귄은 남극에서도 개체 수가 가장 많고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너무 추워서 서식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던 지역에서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꽃을 피우는 남극좀새풀의 증가속도는 지난 10년간 5배 이상, 남극개미자리는 10배나 빨라졌다. 이끼로 뒤덮인 남극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얼음이 녹은 지역은 어김없이 이끼가 차지한다. 이끼는 새로운 토양을 형성하고, 그 토양에 새로운 식물들이 뿌리 내리고. 꽃이 피고 포자가 날리고.

십 년 전 내게 우주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구슬이끼는 이제, 우리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간아 어디로 가시려느냐. 오징어 따라 더 차가운 북극해로. 대구를 따라 더 깊은 바다로. 사과를 따라 더 높은 산으로. 그래서 어디까지 도망갈 수 있겠느냐.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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