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호텔 농성장에서 만난
청년 여성 활동가들

‘자연인’ 말벌 아저씨서 딴 애칭
남태령에서 확인한 ‘연대의 힘’
도움 필요한 곳 쏜살같이 달려가
탄핵 광장의 ‘응원봉 문화’처럼
조끼·머리끈 등도 패션으로 소화
“발랄함과 재치가 우리의 무기죠”
13일 서울 중구 세종호텔 고공 농성장 앞에서 만난 진아(35·활동명)는 수면 바지에 ‘투쟁’이 쓰인 노동조합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는 휴대용 가스레인지로 물을 끓여 농성장을 지키는 청년 여성들에게 차와 컵라면 등을 권했다. 이들은 모두 ‘말벌 동지’들이다.
‘말벌 동지’라는 애칭은 MBN의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온 ‘말벌 아저씨’에서 비롯됐다. 말벌 아저씨는 진행자와 말을 하다가도, 심지어 등목을 하다가도 말벌이 보이면 바로 뛰어가 꿀벌을 구해준다. 말벌 동지들도 말벌 아저씨처럼 어느 현장이든 빠르게 달려 나가 약자와 연대한다.
이날은 고진수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관광레저산업노조 세종호텔지부장이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세종호텔 앞 지하차도 입구 교통시설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한 지 한 달째였다. 세종호텔 농성장 앞에는 어김없이 말벌 동지들이 모였다. 진아와 같은 말벌 동지 해나(20·활동명), 가든(40·활동명)을 지난 3일과 13일 농성장 앞에서 만났다.
우리가 ‘말벌 동지’가 된 이유
해나는 지난해 11월 동덕여대 남녀공학 전환 반대에 동참하며 처음 집회를 경험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집회 대열을 조롱하며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지만, 연대하는 시민들과 모인 학생들은 굴하지 않고 서로를 북돋우며 집회를 이어나갔다. 해나는 “사람이 많으면 우리를 지킬 수 있구나” 깨달았다. 한 달 뒤인 지난해 12월22일 해나는 엑스(옛 트위터)에서 ‘전국농민총연맹(전농)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으니 남태령으로 모여달라’는 글을 봤다. 영하 10도의 한파가 불어닥친 새벽이었다. 해나는 3시간의 고민 끝에 첫차를 타고 남태령으로 향했다.
남태령에서 한나절을 보낸 해나는 집으로 돌아와 멜로디언을 꺼냈다. 남태령에서 한 사람이 장구를 치자 주변에 모여든 이들이 이 소리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춤을 추는 것을 인상 깊게 본 까닭이다. 해나는 이제 매주 농성장 앞에서 멜로디언을 분다.
현장에서 경험한 연대는 다음 연대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됐다. 진아는 지난 1월 노사 교섭 타결을 요구하며 시작한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농성에 참여하며 말벌 동지가 됐다. 진아는 “현장에 계신 분들을 지켜드리려고 가는 건데, 오히려 내가 보호받고 지켜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현장에서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귀하고 빨리 지나간다”고 말했다. 가든은 “연대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함께 얘기를 나누다 보면 내 삶이 긍정적으로 변하는 기분”이라며 “‘이렇게 좋아도 되나’라는 생각에 자꾸 참여하다 보니 어느새 말벌 동지가 돼 있었다”고 말했다.

투쟁도 ‘힙’하고 즐겁게
해나, 진아, 가든 등 청년 여성들이 주축이 된 말벌 동지들이 모이면서 투쟁 현장 분위기는 달라졌다. 이들은 탄핵 광장의 ‘응원봉 문화’처럼 발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이날 세종호텔 농성장 안 벽면은 “너, 좋아하는 투쟁 있어?” “외계인 침공 시 교섭 안 한 원청사장부터 먼저 잡아먹힌다” 등 말벌 동지들이 붙인 스티커와 메모지 등이 가득했다. 말벌 동지들이 직접 만든 ‘집회 굿즈’들이다.
허지희 세종호텔 노조 사무국장은 “말벌 동지들의 발랄함과 유쾌함 덕분에 50~60대 조합원들도 말이 많아졌다”며 “매일 같이 웃고 지내다 보니 한 달 사이 완전히 식구가 되었다”고 말했다.
이들은 노동조합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조끼와 머리끈 등도 ‘패션’으로 소화했다. 해나는 “노동조합 조끼나 머리끈이 ‘힙’하다고 생각한다”며 자랑했다. 이날 해나는 왼쪽 가슴에 ‘단결’이라고 쓰인 조끼를 입고 ‘금속노조’라고 쓰인 붉은 끈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진아도 ‘단결 투쟁’이라고 쓰인 끈을 머리띠처럼 머리에 둘러 묶었다. 명숙 인권네트워크 바람 활동가는 말벌 동지들이 농성장에 달아 놓은 인형 등을 가리키면서 “이런 재치와 좌절하지 않는 마음을 매일 말벌 동지들로부터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연대’
말벌 동지들은 연대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해나는 “나는 여성 운동이나 청소년 운동을 했던 사람도 아니지만, ‘사람이 사람 돕는 데 이유가 있냐’는 마음으로 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6~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 당시 집회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부채감이 있다는 가든은 “처음엔 ‘내가 거기 가서 뭐 해’라는 생각을 했었다”며 “하지만 그냥 와서 있어 보면 생각이 다를 거다.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 곁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는 일은 몇 사람만 경험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반짝이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지속 가능한 연대’도 강조했다. 진아는 “부채 의식을 가지지 말고 꾸준히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며 “서로 몸이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고 서로를 돌보며 연대한다”고 말했다.
고 지부장은 “말벌 동지들의 연대와 활기는 고공 농성을 해온 지난 한 달간 제일 든든하고 힘이 되는 것이었다”며 “연대하고 있는 만큼 꼭 일터로 복직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