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트리거60' ㊵ 산림녹화 프로젝트

1964년 12월 중순, 서독 방문을 끝내고 귀국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생각에 잠겼다. 비행기가 대한해협을 지나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으로 접어들자 그의 눈에 넓게 펼쳐진 시뻘건 민둥산이 들어왔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이렇게 황폐하단 말인가.”
훗날 참모들의 전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서독을 다녀온 후부터 “나무가 우거진 국토를 만드는 것이 부강한 나라로 가는 첫걸음”이라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서독의 울창한 숲에 큰 인상을 받은 박정희는 산림 관계자들에게 “우리는 언제 독일처럼 될 수 있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헐벗은 산림은 우리 삶도 피폐하게 만들었다. 비가 조금만 와도 토사가 씻겨 내려와 하천 바닥이 높아지고, 홍수가 빈발했다. 전답이 매몰되고 폐농도 속출했다. 조금만 가물면 민둥산과 계곡이 순식간에 마르면서 농사를 망쳤다. 산을 다시 푸르게 가꾸는 일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황폐한 한국의 산림이 되살아날 것으로 기대를 한 이는 거의 없었다. 2차대전과 6·25전쟁을 거친 후 유엔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산림은 복구될 수 없다”고 명시됐다.
해방 직후에도 산림 복구 시도는 있었다. 1948년 식목일(4월 5일)을 제정했다. 이듬해엔 공휴일로 지정, 매년 행사를 열었다. 이승만 정부는 산림보호임시조치법을 제정하며 나무 심기를 강조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그마저도 6·25로 물거품이 됐다.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후 비로소 산림녹화는 국가 시책으로 추진됐다.
“새마을운동과 치산녹화 똑같이 중요”

1967년 농림부 산림국이 산림청으로 승격됐다. 산림녹화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선보인 것은 1973년 1월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에서였다. “10개년 계획을 세워 198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를 완전히 푸른 강산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대국민 약속이었다. 농림부 소속 산림청을 내무부 산하 외청으로 전환했다. 중앙 공무원은 물론 지방 시장·군수들의 동참을 독려했다. 73년 3월, 김현옥 내무부 장관은 도지사·시장·군수·경찰서장 등을 불러 ‘치산녹화 10년 계획’(73~82년)을 주제로 교육했다. 그는 “첫째도 산, 둘째도 산! 첫째도 새마을, 둘째도 새마을! 치산녹화와 새마을(운동)은 똑같이 중요하니 혼연일체가 돼 추진해 달라”고 당부했다. “애국가를 부르며 산으로 가자”라는 구호가 장내에 울려퍼졌다(김연표 전 산림청 차장 회고).
방아쇠는 당겨졌다. 매년 3월 21일부터 4월 20일까지 ‘국민식수기간’으로 정하고 온 국민이 팔을 걷고 나섰다. 갓난아기를 업은 아낙네들부터 군인, 어린 학생들까지 가세했다. 산림 간수(산림 단속 공무원)들은 ‘조랑말’을 타고 산을 순찰했다. 경찰은 각종 위반 행위를 단속했다.

초창기에는 주로 아카시나무·리기다소나무·사방오리나무 등을 심었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소위 ‘비료목’이다. 토양이 안정되고 토질 개량이 이뤄진 후에는 부가가치가 높고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수종(잣나무·낙엽송·소나무·백합나무·편백·자작나무·상수리나무·황칠나무 등)으로 바꿔 나갔다. 치산녹화 10년간 남한 면적의 20%에 해당하는 213만 헥타르(ha·2만1300㎢)에 집중적으로 나무를 심었다. 산림 황폐화의 원인 중 하나인 화전민 2만6000여 가구를 이주시키고, 화전지 8만6000여ha도 정리했다. 비만 오면 황토를 쏟아내던 산지가 서서히 푸른 숲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광복 후 현재까지 심은 나무는 약 145억 그루다. 나무의 양은 ha당 165㎥로 50여 년 동안 30배 가까이 늘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치(131㎥)를 상회한다. 한국의 산림녹화 프로젝트는 ‘기적’이라 불린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 중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라고 적시했다. 유엔이 발표한 조림 성공 국가는 독일(서독)·영국·뉴질랜드, 그리고 한국이다.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의 산림녹화는 전 국토에서 이뤄진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세계적인 환경운동가이자 지구정책연구소장인 레스터 브라운도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인 모델이다. 박정희의 결단이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4월, 한국의 산림녹화 기록물(1973~2007년)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오르기도 했다.

국립수목원(옛 광릉숲)에는 ‘숲의 명예전당’이 있다. 산림녹화의 숨은 영웅 8인을 기리는 곳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포함해 김이만 나무 할아버지(자생식물 수집과 조림 수종 종자 품질 개선), 현신규 박사(소나무와 포플러 등 조림 수종 개발), 임종국 임업인(나무 300만 그루를 심은 조림의 대가), 민병갈 수목원장(천리포를 세계적인 수목원으로 조성), 최종현 SK그룹 회장(국내 첫 대규모 활엽수 단지 조성), 손수익 전 산림청장(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수립), 진재량 선생(전남 화순·담양 일대 무등산 자락에 667ha 규모의 숲 조성) 등이 헌정됐다.
한국의 산림녹화는 특정 부처 차원에서 추진한 정책이 아니었다. 새마을 운동과 맞물려 온 국민이 나선 국가 프로젝트였다. 정부는 강력한 행정력을 투입했다. 전국의 공무원이 녹화 현장에 출동했다. 전국 모든 지역의 활착률(옮겨 심거나 접목한 나무가 제대로 산 비율)을 일일이 조사하는 ‘검목 제도’의 영향도 컸다. 각 지역의 성공률에 따라 산림공무원들의 승진 여부가 결정됐다. 공무원들은 산에 텐트를 치고 살며 죽기살기로 나무를 관리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100ha 이상 산불이 나면 지자체장이 해임되기도 했다.
산림매출 149조, 이용 인구 2300만
박정희가 탄식했던 영일만 일대도 황무지에서 푸른 숲으로 바뀌었다. 암반이 뒤섞인 산에 인부들이 허리에 줄을 묶고 올라가 도랑을 파고 나무를 심었다. 철마다 거름을 주고, 가물면 물을 길어다 부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부의 강력한 의지가 산림녹화 프로젝트를 빠른 시간 내에 성공하게 만들었다.

산림녹화 프로젝트는 산사태와 홍수, 가뭄 예방을 넘어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산림의 공익가치(온실가스 흡수·저장, 경관, 휴양, 산소 생산 등 공익적 기능을 경제 가치로 환산한 것)는 1987년 18조원에서 2020년 259조원으로 껑충 뛰었다. 또 산림산업 매출액(2023년 기준)은 149조원, 산림복지(숲 체험, 산악레포츠 등) 서비스 이용인구는 1972년 1200만 명에서 2022년 2300만 명으로 증가했다. 한국은 산림 분야 국제기구인 아시아산림협력기구 설립도 주도했다.
과제도 있다. 산림을 둘러싼 경제와 환경, 공익과 사익의 갈등 해결이다. 그중 하나가 산림 내 도로(임도) 증설 논란이다. 일각에서는 임도가 산림 훼손과 산사태의 원인이라며 반대한다. 무분별한 임도 설치는 곤란하다. 하지만 임도의 긍정적 효과도 적지 않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데 필수적인 기반시설이기 때문이다. 산불이 나면 진화 인력과 장비를 투입하는 통로다. 야간 산불의 경우 임도가 있는 지역과 없는 지역의 진화율이 5배가량 차이가 난다. 숲 체험, 산악레포츠, 산림 휴양·관광 등에도 임도가 이용된다. 독일·뉴질랜드 등 산림 선진국들은 임도 활용에 적극적이다. 한국은 ha당 임도 길이는 4.11m로, 독일(54m)·오스트리아(50.5m)·일본(23.5m)에 크게 못 미친다.
한국의 산은 이제 푸르렀다. 앞으로는 경영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일례로 치산녹화 시기에 심은 나무 중 자원 가치가 낮은 수종을 경제적·환경적 가치가 높은 수종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 임업기계화, 전문인력 양성 등 산림 인프라를 늘려가며 선진국형 산림경영에 힘쓸 때다. 국가 경제와 국민 행복이 함께하는, 이른바 모두가 숲으로 잘사는 ‘산림 르네상스’를 열어가야 한다.
창간 60주년 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은 아래 링크를 통해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포항제철, 쇳물의 기적’ 편입니다.

남성현 국민대 석좌교수 (전 산림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