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호이저’ 연출 요나 김
1초도 틀리면 못 견디는 성격
지금까지 몰랐던 ‘심청’ 준비
지난달 국립오페라단이 1979년에 이어 두 번째로 선보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는 동시대 유럽의 감각을 반영한 현대적인 연출을 보여줬다. 관능의 여신 베누스와 순수한 여인 엘리자베트를 대등하게 그렸고, ‘여성을 통한 구원’이라는 낡은 서사도 제거했다.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도 눈에 띄었다. ‘바그너 오페라는 길고 지루하다’는 통념을 깬 연출이었다. 일부 관객은 파격적인 연출에 놀랄 법도 했다.
“놀라는 건 좋은 경험 아닌가요. 오감이 깨어나니까요.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객을 ‘하이’하게 만들려 해요. 설령 ‘이게 뭐지?’ 하고 화가 나더라도 아무튼 깨어나게 해야죠. 그렇게 관객이 집중해서 보는데 또 15분 지나면 ‘약발’이 떨어지거든요. 그러면 또 제가 (연출적) 처방을 해요.”
최근 서울 강남에서 만난 연출가 요나 김이 말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대에서 미학·연극학 등을 공부했다. 이후 <투란도트>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등을 연출하며 유럽 무대에서 인정받았다. 현재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로 재직 중이다.
설정만 특이하게 한다고 관객을 자극할 수는 없다. 이런 설정을 뒷받침할 정교한 연출이 필요하다. 음악에 맞춰 막이 오르고 내리는 걸 초 단위로 연습했다. 요나 김은 “1초도 틀리면 안 된다. 제가 성격상 그런 걸 못 견딘다”며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격언을 강조했다. 요나 김이 등장인물이 ‘부슬부슬한 털 달린 킬 힐’을 신길 요구해서, 의상 디자이너가 동대문 시장을 수소문하기도 했다.
성악가의 연기도 강조했다. 이번 <탄호이저>에선 성악가의 표정 연기가 영상을 통해 크게 보이기 때문에, 연기가 더 중요했다. 요나 김은 “베누스가 담배를 드는 각도, 다리를 꼬는 방식까지 연습했다”고 전했다.
요나 김은 무대에서 영상을 즐겨 사용하지만,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는다. “무대의 중심은 결국 성악가와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상은 잘못 쓰면 독이 된다. 사람 눈을 한 번에 잡고 ‘도미넌스’(지배력)가 너무 크다”며 “결국은 밸런스 게임이다. 그래서 전 흑백 톤을 써서 이야기를 방해하지 않고 도움이 되게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애초 기획했던 구상들이 모두 실현되지는 않았다. 처음엔 탄호이저와 엘리자베트가 죽고 홀로 살아남은 베누스가 오페라극장을 벗어나 예술의전당 앞 대로로 나아가는 장면을 영상으로 찍어 송출하려 했다. “‘나 이 동네 살기 싫어’ 하고 뛰쳐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둠이 깔린 길에 차들이 막 지나가는 게 우리 원래 엔딩이었다”고 전했다. 이 구상은 제작 여건상 구현되지 못했다. 유럽에선 2시간 안팎 오페라는 6주, 바그너 오페라는 8주의 리허설 기간을 두지만, 이번엔 3주밖에 없었다는 점도 ‘한국 시스템’을 체감한 계기가 됐다.
요나 김이 한국에서 선보일 차기작은 국립극장·전주세계소리축제가 공동제작해 내년 여름 공개할 <심청>이다. 판소리 대본을 활용하기에 ‘창극’이라 불릴 법도 하지만, 조금 더 보편적이면서도 새로운 ‘제3의 장르’를 기획한다는 점에서 ‘소리뮤직시어터(소리악극)’ 혹은 ‘소리뮤직드라마’라는 이름을 구상 중이다. <탄호이저>의 독일 스태프들이 다시 한번 참여할 예정이다. 어린 효녀가 아버지의 치료비를 위해 팔려가는 이야기가 세계적·보편적일 수 있을까. 너무 잔혹한 것은 아닐까. 요나 김은 “옛 동화들은 착한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끔찍한 권력 구조, 억압의 역사가 녹아 있다”며 “(심청이 같이 권력 없는 여성, 아이는) 독일어로 ‘ohnmacht’, 영어로 ‘without power’다. 자기 언어가 없어 아무리 말해도 들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요나 김의 <심청>은 ‘심청은 심청이되, 지금까지 몰랐던 심청’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