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속출하는 기후 재앙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그리고 공동체 해체 위기. 오늘날 자본주의가 직면한 위기는 경제 영역을 넘어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한다. 성장의 과실은 소수에 집중되고, 사회적 비용은 대다수 국민에 전가된다. 이런 구조적 한계를 넘을 해법으로 ‘신(新)기업가정신(New Entrepreneurial Spirit)’이 주목받고 있다.
신기업가정신은 자본주의의 폐해의 보완책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돈을 얼마나 버느냐’에 집중된 운영 방식을 ‘이익 창출을 통해 사회에 어떤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느냐’로 전환하자는 제안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사회가 만든 긍정적 변화를 점수나 금액으로 수치화하고, 이를 투자나 보상에 연결하며, 정부·기업·시민사회가 신뢰를 기반으로 협력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윤보다 사회적 가치 창출 중시
자본주의 폐해 보완책으로 주목
정부의 역할 전환도 동시에 필요

이와 관련해 주목할 사례는 SK가 지난 2015년부터 운영하는 ‘SPC(Social Progress Credit)’ 제도다. 사회적 기업이 창출한 사회적 가치를 화폐 단위로 측정하고, 성과에 따라 현금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성과 측정에서 보상까지 이어지는 명확한 구조를 통해 사회적 가치 창출 활동이 단순한 기업의 사회책임 이행이 아니라 기업의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적 선택이 되도록 만들었다. 이 제도는 수백 개 사회적 기업의 참여를 끌어냈으며, 누적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수천만 달러의 보상을 지급했다.
이런 방식은 장점이 분명하다. 첫째, 사회적 가치를 기업 경쟁력의 중심에 둘 수 있다. 둘째, 공공의 문제 해결 과정에서 민간의 창의성과 자원을 잘 활용할 수 있다. 셋째, 정부·기업·시민사회가 각자의 강점을 살려 협력하는 구조가 가능해진다. 경제적 성과와 사회적 성과를 동시에 추구하는 ‘두 개의 엔진’을 장착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이상을 실현하려면 정부의 역할 전환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단순한 지원 제공자에 머무르지 않고, 시장 질서를 설계·조정하는 ‘생태계 설계자’가 돼야 한다. 이는 규제 체계, 정책 방향, 인센티브 구조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하는 작업이다. 특히 시장과 정책이 공동의 언어와 판단 기준을 형성하도록 이끄는 역할이 중요하다.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을 ‘경제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선택’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책무다.
정부는 사회적 가치가 시장 논리에 종속되지 않도록 방파제 역할도 해줘야 한다. 사회적 가치를 계량·자산화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신뢰, 생태 안정성, 시민성 등과 같은 비계량적 가치가 배제될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을 막으려면 제도 속에서 비계량적 가치가 존중받도록 정책 장치를 병행해야 한다.
신기업가정신이 현실에서 작동하려면, 기회 접근의 평등성과 사회 안전망, 실패를 감내할 문화도 필요하다. “지금 여기에서, 지금 가진 것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라”는 조언은 가진 것이 없는 이들에겐 공허하다. 정부는 교육·금융·복지 제도를 통해 실질적 기회의 평등을 확보해야 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정부 구조가 이런 역할을 감당할 준비가 돼 있는지다. 단기에 치중하는 정책, 정권 중심의 ‘브랜드 사업’ 문화, 세습형 능력주의를 해소하기 위한 교육·자산·불평등 개혁의 정치적 난이도를 고려하면 쉽지 않다. 규제의 일관성, 정책의 예측 가능성, 성과 기반 행정체계 확립 없이는 정부의 조정자 역할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결국 신기업가정신의 제도화와 정착 여부는 정부 역량에 달렸다. 이는 법과 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문화와 정치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가 생태계 설계자로서 신뢰를 얻으려면 사회 전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거버넌스 혁신, 정책 연속성 확보, 시장과 시민사회의 적극적 참여를 끌어내는 설계 능력을 갖춰야 한다.
신기업가정신은 시장·정부·시민사회가 함께 만드는 장기 프로젝트다. ‘지속가능한 자본주의’가 공허한 수사로 끝나지 않으려면, 정부 역할을 재정의하고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 사회적 가치가 시장 논리에 종속되지 않게 하려면 어떤 철학과 거버넌스가 필요한지 새 정부가 답을 제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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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범 건국대 대외부총장·세계행정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