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루고 미뤘던 냉장고 청소를 했다. 2023년 1월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2년 반도 훨씬 넘어 처음 하는 대청소다. 그래도 명색이 환경미화원으로 세상의 쓰레기를 정리하고 치우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이상하리만큼 직업의 틀(?)을 바로 던져버린다.
냉장고 안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여러 음식과 재료들이 마치 빙하기를 겪은 것처럼 꽁꽁 얼려져 있거나 숨겨져 있었다. 집에서는 요리를 거의 하지 않기에 냉장고 안에 있던 것들이 화석처럼 굳어져 있기도 했다. 그중 내 눈에 가장 확연히 띄었던 것은 고사리였다. ‘그래, 맞다! 어머니는 고사리를 무척이나 좋아하셨지!’ 살아생전 어머니는 평소에 고기보다 나물과 채소를 더 좋아하셨는데, 특히 고사리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엄마, 이번에는 나물 집에서 일한다. 새벽 4시 30분부터 건 고사리 10kg을 솥에 삶는데 삶아 놓으면 그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네, 10kg 삶으니 40kg 훨씬 넘게 나오네! 내 삶도 언젠가는 이렇게 삶아졌으면 좋겠다.”
“그래~ 아들아 네 삶도 지금 삶아지는 중이니, 좌절하지 말고 희망을 잃지 말자!”
나는 30대 초, 중반 대구에서 규모가 가장 큰 농수산물 도매 시장에서 5년 정도 일했는데, 그 기간 중 1년은 각종 나물을 삶아서 파는 곳에서 일했다. 그리고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물 가게에서 일하고 난 뒤에야 처음으로 어머니가 고사리를 좋아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고사리의 고소한 맛과 특유의 향 그리고 부드러운 식감이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국산은 맛있지만 비싼 가격 때문에 어머니는 잘 사 먹지 못하셨다. 나는 나물 집에서 일하며, 명절 기간 울산 집에 들를 때마다 국산 고사리를 꽤 많이 사서 가지고 갔다. 물론 저렴한 도매가로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고사리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 타지에서 고사리를 볼 때마다 어머니가 떠올려져 반가웠다. 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고사리를 볼 때면 마음 한쪽이 시큰거렸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 고사리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면 밑줄을 그으며 더 의식적으로 공부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유명한 말처럼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셨던 고사리를 바라보는 내 눈 역시도 전과 달라졌다.
고사리는 고생대를 대표하는 양치식물로, 양치(羊齒)식물이라는 이름은 고사리의 잎이 ‘양의 이빨’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분류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스웨덴의 학자 칼 폰 린네는 18세기에 양치류가 어떻게 번식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 비밀스러운 수수께끼를 표현하기 위해 ‘은화식물(隱花植物-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식물)’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고사리처럼 이파리에 포자가 달린 양치류는, 꽃이 피지 않는 대신에 포자를 이용하여 번식하는 식물들로 아직도 고생대의 번식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꽃이 피지 않았던 고생대에는 곤충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포자는 오로지 바람과 물의 힘으로 퍼져나갔는데 억겁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말린 고사리 한 뭉치/ 무게를 누군가 묻는다면/ 하여튼 묻는다면/ 내 봄날을 살아낸 보람 정도라/ 답으로 준비한다/ 곰곰이 생각하여도/ 그러하였으니까// 말린 고사리 두어 뭉치 더 담아서/ 이름난 백화점 봉지에 넣어서/ 사랑스런 분에게 주었다 치자/ 또 받았다 치자// 잘 받아서 집으로 돌아가며 그 무게가 궁금은 하겠지만/ 우리들이 한 해 살아온 보람 정도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그렇구 말구/ 말린 고사리
-장석남, 〈뺨에 서쪽을 빛내다〉, ‘말린 고사리’, 창비
‘말린 고사리’란 시를 읽으며 어머니가 떠올려졌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국산 말린 고사리를 주문하셨고, 일부는 삶아 두셨다. 결국, 드시지 못한 말린 고사리와 삶은 고사리가 집 냉장고에 있었다. 냉장고 청소하다 구석에서 발견한 고사리, 예전 나에게는 하잘것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고사리가 억겁의 시간을 견뎌낸 위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어머니 덕분이다. 거대한 공룡 같은 수많은 생물은 지상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아주 연약해 보이는 고사리는 지금까지 지구가 겪은 모든 멸종 사건과 그 밖의 흥망성쇠를 뒤로하고 살아남았다. 고사리는 겨울을 견디고 빛과 어둠의 시간을 통해 온전히 봄을 만끽한다. 내 삶도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고사리처럼 억겁의 삶의 무게를 묵묵히 살며, 빛과 어둠의 시간을 온전히 견뎌낸 보람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형진 환경미화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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