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속 죄와 벌 이야기

2025-03-31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죄와 벌.

하늘이 열리고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기 시작한 이래 ‘죄와 벌’은 늘 있었다. 오랜 옛날부터 형벌은 죄를 짓는 자를 벌주거나 권력자가 약자를 탄압하는 수단이었다. 형벌을 잘 들여다보면 당시 사회가 어떤 것을 금기시했는지, 어느 정도로 성숙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 역사 속 형벌을 알기 쉽게 풀어낸 이 책, 장경원의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우리 역사 속 죄와 벌’이라는 부제처럼,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난 형벌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때로는 그 잔혹함에 놀라고, 때로는 먼 옛날인데도 죄인의 인권을 배려하는 모습에 놀라게 된다.

처음에 신라의 형벌 제도를 이어받은 고려는 중국 당나라 형벌 제도를 받아들여 보완했고, 11세기 문종 때는 우리 형편에 맞게 크게 손질했다. 형벌에 관련된 일은 ‘형부’라는 관청에서 다루었고, 감옥을 관리하는 일은 ‘전옥서’에서, 죄지은 벼슬아치들은 따로 ‘어사대’라는 기구에서 맡았다.

고려의 다섯 가지 형벌 제도는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이었다. 태형과 장형은 매를 치는 것이고, 장형은 매질에 힘든 일까지 더한 것, 유형은 유배를 보내는 것, 사형은 죽이는 것이었다. 이 기본적인 다섯 가지 형벌을 조합하여 벌을 더하기도, 감하기도 했다.

고려 사회는 나름 자유분방했을 것 같지만 뜻밖에 엄정한 기강이 있었다. 고려에서는 남편이 까닭 없이 아내를 버리면 벌을 받았고, 남편이 주먹질해서 아내의 이가 하나라도 부러지면 매질 아흔 대였다. 노름하다 걸리면 매질 백 대, 금주령이 내린 때 술에 취했다가 걸리면 관리는 벼슬을 내놓고 베 일흔 필을 내야 했고, 일반 백성은 곤장 일흔일곱 대를 맞았다.

조선도 비슷하게 고려처럼 다섯 가지 형벌을 기본으로 하되, 형벌의 적용권을 좀 더 제한했다. 흔히 사또라 부르는 수령은 태형만 집행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하는 관찰사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사형은 임금의 권한이어서, 재판을 세 차례 거치고 신하들과 두루 논의한 뒤에야 결정했다.

(p.45)

광해군 때 이런 일이 있었어. 맵가시란 여인이 큰 죄로 고문을 받다가 “나, 임신 칠 개월이에요!”라고 소리쳤어. 형리들은 곧바로 동작을 멈췄지. 형벌을 다룬 법전에 따르면 “아무리 죽을죄를 졌어도 임신한 여인은 함부로 다룰 수 없다.”고 되어있거든.

죄수의 말을 못 믿겠는지 형리가 의원을 데려왔어. 진찰해 보니 임신이 맞아. 이 일을 전해 들은 광해군은 “임신했다고? 그럼, 옥에 가두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기다려라!”하고 명령했대. 비록 죄수지만 임신한 여인을 보호하려는 마음, 조선시대 형벌의 너그러움이 엿보이는 대목이지?

이렇듯 형벌을 관대하게 적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임금 가운데는 정조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만 사형을 결정할 수 있었기에, 정조 역시 천 가지가 넘는 사형 사건을 다루었지만, 사형 판결은 36번만 내릴 정도로 신중했다. 많은 백성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죄를 짓게 된 것을 딱하게 여긴 것이다.

정조가 24년 동안 재위하며 다룬 사건들을 모은 《심리록》이라는 책도 있는데, 이를테면 사건 수첩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는 습관이 있었던 정조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암행어사를 보내서라도 재조사하게 했고, 억울하게 죽을 뻔한 백성을 여럿 살려냈다.

옛날에는 고문을 ‘고신’이라 했다. 현대에는 금지된 고문이 옛날에는 빈번하게 행해졌지만, 나름대로 법에 ‘사흘 걸러 한 차례’라고 정해놓고, 또 몽둥이에 해당하는 ‘신장’으로 살이 많은 장딴지만 내리치도록 하는 등 형벌 부위를 제한하는 노력이 있었다.

‘신장’이라는 매는 워낙 혹독했기에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수령이 신장을 쓰려면 먼저 관찰사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한 번에 서른 대 넘게 치지 못했다. 한 차례 신장을 치면 사흘이 지나야 다시 칠 수 있고, 이런 규정이 잘 지켜지도록 나라에서 엄중히 단속했다.

한편, 나라를 빼앗길 무렵에는 감옥 수가 크게 늘었다. 의병 활동을 한 사람들과 애국활동을 한 사람들이 마구 잡혀 오면서, 오늘날 서대문 형무소로 불린 경성 감옥을 비롯해 인천, 춘천, 청주 등 전국에 감옥이 생겨났다. 기껏해야 200명 남짓이던 죄수 숫자는 1908년 2,000명이 넘을 정도였고,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다 보니 아비규환이 벌어지곤 했다.

세월이 흐르며 가혹한 형벌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형벌 하나에 인생이 갈렸던 수많은 이들의 피, 땀, 눈물은 여전히 생생하다. 사극만 보아도 고문과 사약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가. 오늘날에는 적어도 이런 신체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역사의 진보를 체감케 한다.

죄와 벌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죄인을 벌하는 사람의 역할도 막중하다. 자칫하면 엉뚱한 사람이 고통받게 되는 만큼, 죄를 결정하는 데 신중하고 또 신중했던 옛사람들의 모습을 새기며 빈틈없이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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