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군복과 정치인

2025-02-06

지금은 어떨지 모르나 수십 년 전 예비군 훈련을 받아본 필자로서는 예비군복이 주는 특별한 느낌과 감흥(?)을 생각한다. 번듯한 정장 차림으로 성실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1년에 두어 번 예비군 훈련이라도 있는 날이 되면 귀찮음과 오래된 친구들을 만난다는 설렘이 오가고, 그리고 촌스럽기는 하지만 예비군복을 걸치기만 하면 세상의 속박을 모두 벗어던져 버리는 듯한 해방감에 예비군 훈련은 약간의 들뜬 마음을 주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른 아침에 아내가 챙겨준 예비군복, 먼지가 가득 낀 통일화, 바래고 찌그러지다 못해 머리에 구겨 넣으니 모자인 줄 알게 생긴 헝겊쪼가리 같은 모자를 쓰고 훈련장에 들어서면 근동의 게으르고 어설픈 종자들은 다 모인 듯하다. 도롯또(?) 4분의 2박자에 발을 맞춘 세상 게으른 걸음걸이에, 찢어진 예비군복을 입고 온 자, 운동화를 신고 온 자, 하의에 들어가야 할 상의는 바지 위에 걸쳐 있고, 심지어 예비군복 대신 교련복인지 몸빼(?)같은 바지를 입고 온 ‘어제의 용사’들을 보는 재미는 호기심과 함께 쏠쏠한 웃음마저 주기도 하며, 거기에 거리낄 것 없는 그들의 노상 방뇨는 예비군복들의 크나큰 특권이기도 하였다.

집합시간에서 약 두어 시간이 지나면 인생 중 가장 재수 없는 날을 맞이한듯한 현역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선배님들 이짝으로 좀 모이셔유, 줄 좀 맞쳐 서봐유”여기에 장단을 맞춘 예비군들의 대답이 가관이다. “줄은 3년동안 X나게 맞췄으니 대충햐. 글고 나 대목리 청년 회장여. 경례 좀 붙여봐”라며 누가 들어도 개 하품하는 소리로 딴지를 걸어댄다. 얼핏 보아도 시골 논두렁에서 지게 작대기 붙잡고 씨름 꽤나 해재낀 듯한 그들의 위세에 생애 가장 재수 없는 날을 맞은 왕눈이 현역은 뒤에서 멀거니 바라보는 예비군 중대장의 눈치만 실실 보았고, 그 중대장은 그런 난감함을 애써 못 본 체하느라 고개는 외로 꼬이고, 그나마 작은 눈은 실잠자리 눈이 된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무렵에서야 겨우 출석 체크 마치고, 하품 나오는 정훈교육과 게으른 강아지 파리 쫓는듯한 어설픈 동작 몇 개 맞추다 보면 훈련 끝이다.

중대장으로부터 수료증을 받아드는 순간 ‘당나라 예비군’들은 ‘최정예 특급전사’로 대변신을 하고, 걸음걸이는 행진곡풍의 4분의 4박자로 빨라지며 중간에 사복으로 갈아입은 누군가는 옥골선풍(玉骨仙風)으로 대변신을 하여 얼마 전의 그 예비군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자태(?)에 아우라까지 느껴지는 것이 그 시절의 훈련이 끝난 예비군 훈련장의 뒤풀이 모습이다.

현재 정치권, 그중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원 중 여럿은 필자와 같이 근무를 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에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던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술자리에서 숱하게 나누었던‘정의’라는 단어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기만 하다. 그런데 정치권에 입문한 그들 대부분은 돌연 ‘예비군복 입은 정치인’으로 대변신을 한다. 현재 여의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자면 ‘도대체 저 사람이 과거 나와 함께 정의를 논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의 상식 이하의 발언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필자는 “안다, 알아, 다 알아! 과거나 현재나 변한 것은 없으나 다만 정치적 입지와 환경만 달라졌을 뿐이다”라고 수십 번을 다짐하며 이해하려 해도 그들의 지나치게 몰염치하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생각하면 우리 같은 비정치적 성향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 중의 누구에겐가 “엊그제 그 말씀 정말 소신이세요?”라는 질문에 그는“아이, 무슨 말씀이세요. 저 하나도 안 변했어요. 다만 정치는 연극이니까요”라며 해맑게 웃어 재낀다. 맞다. 인생 자체가 연극인데 하물며 표를 먹고사는 정치인들에게는 연극이 일상이리라. 뉴스만 보면 상식과 전혀 동떨어진 언행을 하는 정치인, 불합리를 합리적이라 우겨대며, 입에 걸레를 물고, 노상 방뇨도 서슴지 않는 그 예비군복 입은 정치인 때문에 요즘 개그맨들이 생업전선에 뛰어든다는 뉴스가 간혹 보도된다.

용모단정하고 세상 바르던 청년이 예비군복 하나로 망가진 것처럼 예비군복을 걸친 정치인은 자신의 과거를 크게 망가뜨리며 정치적으로 성장해나간다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더 큰 문제는 예비군복을 걸친 정치인의 그 연극이 실제 우리 정치를 지배하고 있으며, 수많은 군중을 선동하고,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호도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을 켜니 어느 “예비군복 입은 정치인”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해재낀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하는 말이다.

“여보, 여의도에 예비군복 하나 보내드려야겠어요”

이성순<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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