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교 지필고사 폐지 반작용 심화
중간·기말 없애고 쉬운 단원·수행평가
중학생 돼야 첫 시험, 낮은 점수에 충격
학원 레테는 전국 등수까지 알 수 있어
유명 수학학원 입학시험 1만명 응시도
사교육·과열 경쟁 줄인단 無시험 기조
되레 사교육업체 평가 공신력 키워줘
기초학력 미달학생 증가 또 다른 문제
“학습 동기 고취하는 적절한 평가 필요”
서울에 거주하는 A씨는 초등학생 자녀와 1년에 2∼3차례 인근 유명 수학 학원들을 찾는다. 학원에 다니려는 것은 아니다. A씨의 목적은 소위 ‘레벨 테스트’라 불리는 학원의 자체 입학시험이다. A씨는 “수학은 학원에 다니지 않고 집에서 공부하는데 제대로 된 학교 시험이 없다 보니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가늠이 안 된다”며 “객관적인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학원 레벨 테스트를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학교 단원 평가는 대부분 다 맞을 정도로 변별력이 떨어지지만 학원 시험은 아이 수준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대형학원은 전국 석차까지 나온다”며 “‘초등학교 때는 사교육을 최대한 덜하자’는 주의였지만 정확한 정보를 알려면 학원에 갈 수밖에 없다. 올해는 학원 수업도 들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에서 중간·기말고사 방식의 지필 평가가 사라지면서 과도한 경쟁과 ‘성적 줄 세우기’가 줄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일각에선 이런 ‘평가 지양’ 기조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학부모들이 아이의 실력을 알기 위해 학원 문을 두드려야 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한 정책이 오히려 사교육의 공신력을 높여주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아이 실력 알려면 학원으로”
12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201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초등학교에서 중간·기말고사 등 지필 평가가 폐지됐다. 단답형과 암기 위주의 평가가 불필요한 경쟁과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취지다. 현재는 교사 재량에 따라 각 단원이 끝났을 때 간단한 단원평가 등만 치러진다.
덕분에 학업 부담이 줄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학부모 사이에선 답답함을 호소하는 이들도 많다. 초등학생 학부모 B씨는 “수학 단원평가 시험지를 가져오지만 전반적으로 쉬워서 그것만으론 아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다”며 “국어 등 다른 과목은 시험지를 가져오지도 않고, 특히 영어는 집에서 실력을 측정하기 쉽지 않다. 뭘 못하는지 알아야 대비라도 하는데 답답한 구조”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생은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제대로 된 첫 시험을 본다. 이때 충격을 받는 경우가 많다. 중학생 학부모 C씨는 “1학년 2학기 때 첫 시험을 봤는데 아이가 시험공부 방법 자체를 잘 몰라서 놀랐다. 생각해보니 그간 시험공부를 해본 적이 없더라”며 “성적표를 받아보니 그동안 학교만 믿고 무심했던 것 같아 후회됐다”고 말했다.
답답한 학부모들의 발길이 향하는 곳은 학원이다. 현재 대부분의 유명 학원은 입학 문의를 하는 학생에게 자체 레벨 테스트를 보게 하고, 결과에 따라 반을 나눠 알려준다. 학부모들에게는 학원의 ‘반 통보’가 아이의 성적 가늠자가 된다.
‘극심화’ 수학 수업으로 유명한 ‘생각하는 황소’ 학원의 경우, 학군지 등에선 ‘필수 시험’으로 자리 잡았다. 예비 초 3·4학년을 대상으로 매년 11월과 2월 치르는 입학시험엔 전국에서 약 1만명이 응시한다. 이 학원은 학업 수준에 따라 반을 4개로 나누는데, 시험 후 각 반의 합격선과 전국 응시생 중 백분위 등이 상세하게 공개된다. 학원에 다니기 위해 시험을 보는 이들도 많지만, A씨처럼 단순히 아이 실력이 궁금해 응시하는 이들도 많다. 응시자가 많으니 업체의 영향력이 더 올라가고, 매년 더 많은 이들이 시험을 보는 구조다.
지난해 아이와 함께 황소 학원 시험장을 찾았던 학부모는 “보낼 생각은 없었고 그냥 시험이 궁금해서 가봤는데 막상 아이가 합격했다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며 “레벨 테스트 자체가 학원 홍보 효과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 시험이 잘 돼 있어도 레벨 테스트를 보러 가는 사람도 있겠지만, 학교에서 시험이 좀 더 체계적으로 진행되면 학원 레벨 테스트는 보지 않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학원 레벨 테스트가 유행하는 것은 학교의 책임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서울 노원구의 한 보습학원 관계자는 “예전엔 학교 시험에서 100점을 받으면 공부 잘하는 아이였지만, 요즘은 ‘어느 학원 상위권 반에 합격했다’는 것이 공부 잘하는 아이의 기준”이라며 “소규모 학원에선 황소 등 유명 학원 합격자를 얼마나 배출했는지로 홍보한다. 유명 학원들의 권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학부모 D씨는 “아이들이 계속 시험 없이 살 수 있으면 몰라도 현재 한국 교육은 엄연하게 대입이 있는데 초등학교에서만 시험을 안 보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라며 “너무 과도하게 하면 문제지만, 아이 수준을 알려주는 것도 학교의 역할 같다. 현재는 공교육이 할 일을 안 하니 사교육 업체에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평가 없는 정책은 사교육 유발”
특히 최근 기초학력 미달 문제가 대두되면서 평가 지양 기조에 대한 비판은 더 커지고 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매년 전국 중3과 고2의 3%를 표집해 실시하는 국가수준 학업성취도 평가에서 중3 수학 기초학력 미달(1수준) 비율은 2017년 7.1%에서 2023년 13.0%로 늘었다. 국어 1수준도 같은 기간 2.6%에서 9.1%가 됐다. 기초학력 저하는 코로나19 영향도 있지만, 무(無)시험 기조가 문제를 더 키운다는 비판도 많다.
실제 보수 성향 교육감들은 기초학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초등학교 평가를 강화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강원도의 경우 진보 교원단체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의 단체 협약에 ‘초등 진단평가 및 중간·기말고사 등 일제 형식의 평가 금지’ 조항이 있는데, 신경호 강원도교육감은 지난해 단체협약 실효를 선언하며 초등학교 시험을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강원도교육청 관계자는 “꼭 지필 평가 중심의 중간·기말고사를 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초등학교 평가가 수행평가 중심인 것은 문제라는 입장”이라며 “교사 설문조사 등을 통해 효과 있는 평가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말했다.
다만 진보 교육감이 있는 지역은 여전히 평가 확대 기조엔 부정적이다. 서울은 지난해 교육감 보궐선거 당시 보수 성향 조전혁 후보가 공약으로 초등학교 지필 평가 부활을 내걸자 진보진영 후보였던 정근식 서울시교육감은 “지필 평가 부활은 퇴행”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교육부는 각 학교가 기초학력 미달 학생 등을 찾을 수 있도록 ‘맞춤형 학업성취도 평가’를 지원하는데, 지난해 17개 교육청 중 11곳은 초등학교·중학교 참여율이 90% 이상이었지만 서울(34.8%), 울산(15.7%), 경남(15.3%)은 참여율이 저조했다. 3곳은 진보 성향 교육감이 있는 곳이다.
교육학자들은 지나친 경쟁은 비교육적이지만, 평가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것도 부작용이 크다고 지적한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교육학)는 “평가는 학습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요인도 된다. 건전한 경쟁으로 학업성취도가 올라갈 수도 있다”며 “학습은 상대적인 위치를 알아야 할 때도 있다. 등수까지는 아니더라도, 한 학기나 1년에 한 번 정도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교육학)는 학교의 평가를 ‘건강검진’에 비유했다. 그는 “학생들이 스트레스 받으니 시험을 없앤 것은 성인들이 건강검진 받으면 스트레스 받으니 안 하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박 교수는 “국가가 건강검진을 안 해주면 사설 병원에서 돈 주고 검진해야 한다. 검진을 안 하는 사람은 조기에 잡을 수 있는 질병도 잡지 못하고, 검진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벌어질 것”이라며 “학교 시험도 똑같다”고 강조했다.
그는 “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안 보면 경쟁이 없어진다고 보는 것은 착시다. 부작용 없는 수준의 평가도 충분히 가능하다”며 “평가를 안 하는 정책은 사교육 의존도를 높여주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세종=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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