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댜길레프의 제국
루퍼트 크리스천슨 지음, 김한영 옮김
에포크
어떤 이가 발레 매니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그의 서가에 이 책이 꽂혀 있는지를 보라. 20세기 초의 예술 혁명, 나아가 한 인간의 성장담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도 권한다. 세르게이 댜길레프(1872~1929)가 가브리엘 샤넬부터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류하며 시대를 풍미하고, 스러져간 드라마다.
“이 책을 쓴 나는 중독된 사람이다.” 영국의 무용 평론가 루퍼트 크리스천슨은 460쪽에 달하는 책을 이렇게 시작했다. 참고문헌만 32쪽, 세밀한 부분까지 파고들며 자료를 찾아낸 ‘중독’의 결과 ‘세기의 기획자’ 댜길레프가 이룩한 발레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저자는 마리우스 프티파, 조지 발란신 같은 안무가도, 안나 파블로바나 마고 폰테인 같은 무용수도 아닌 댜길레프에 주목했다. 문화계 전반의 흐름을 틀어쥔 막후 실력자인 댜길레프의 명석한 부분부터 추한 면까지 철저히 짚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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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에서 발레가 쇠퇴하던 20세기 초, 댜길레프는 러시아를 떠나 세계를 호령하는 발레단을 꿈꿨다. 그가 파리에서 만든 발레단의 이름은 ‘러시아 발레’를 뜻하는 프랑스어 ‘발레 뤼스(Ballet Russe)’. 높고 빠르게 점프하는 남성 무용수들의 힘과 관능미를 앞세운 러시아 발레에 파리의 관객들은 열광했다. 당시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와 프로코피예프, 무대 미술의 신기원을 이룬 브누아, 피카소, 마티스의 세트 디자인, 코코 샤넬의 의상 등 각계 최고의 예술가를 알아본 ‘전설의 안목’이 바로 댜길레프였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운동의 진원지가 된 발레 뤼스의 찬란한 순간은 댜길레프의 때이른 죽음으로 20년 만에 빛을 잃는다. ’댜길레프의 제국‘은 몬테카를로 발레단(보리스 코흐노), 파리 오페라 발레단(세르주 리파), 뉴욕 시티 발레단(조지 발란신) 등 후계자들이 만든 무용단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