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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징 스타’.
진부한 수식어지만 만 서른이 안 된 1996년생 작가 이목하를 소개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어울리는 단어를 떠올리긴 어렵다. 2023년 아트바젤에서 매년 가장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 25인을 꼽는 ‘디스커버리스’에 이름을 올리며 주목받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10월에는 글로벌 미술 플랫폼 ‘아트시(Artsy)’가 꼽은 유망한 세계 신진 예술가 10인에도 선정돼 조명을 받았다. 하이라이트는 같은 해 11월 홍콩에서 열린 필립스 옥션에서 연출됐다. 그의 그림 ‘난 나답지 않아(I’m Not Like Me, 2020)’가 예상 낙찰가 40만~60만 홍콩달러보다 3배가량 높은 165만 1000홍콩달러(약 3억 원)에 팔린 것이다. 한국 기성 작가도 경매 낙찰가가 ‘억대’인 경우는 보기 드문 가운데 20대 신진 여성 작가의 작품이 이룬 쾌거는 한국 미술계를 들썩이게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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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두가 들뜬 가운데 정작 작가 본인은 그때의 기분을 “오히려 숙연해졌다”고 떠올린다. 작가는 “4년여 전 개최한 첫 개인전에서 400만 원에 팔렸던 작품이 시간이 흘러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라며 “그런 만큼 다음 작업은 그때보다도, 지금보다도 더 견고해져야 하겠다는 부담을 느꼈다”고 말했다. 자신의 역량을 좀 더 크게 가져가기 위해, 어제보다 더욱 성장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작가를 서울의 오래된 동네 청량리에 자리잡은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수십개의 나사못 박힌 작업실
완성된 작품 들어내고 텅빈 벽면 볼땐
어떤 그림으로 다시 채울까 설렘 느껴
재개발이 한창인 청량리에서 ‘예술’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낡고 남루한 건물 내부 깊숙이 있는 작업실의 안은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약 100㎡(30평) 크기 공간은 충분히 넓고 층고 역시 높은 데다 실제 갤러리에서 쓰는 조명이 빛을 밝히고 있어 한눈에 ‘화사하다’는 인상이다. 두 개로 구분된 공간 중 한 곳은 그림을 걸어두며 다른 이들에게도 보여주는 전시 공간으로, 다른 한 곳은 실제 작업에 쓰고 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면서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나만의 장소를 절실히 원했던 작가는 약 2년 반 전 이곳을 발견했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제 작품이 표현하는 색이 더 강해지고, 밀도가 높아지고, 사이즈가 커졌던 시기가 있었다”며 “작업실 공간이 커지고 밝아지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많아졌던 영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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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눈길을 끄는 곳은 수십 개의 나사못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는 두 개의 벽면이다. 작가는 과거 작품들이 새 작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지도 같은 역할’을 한다며 “완성된 그림을 바라보며 작업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이때 캔버스를 걸어두는 곳이 이 벽면이다. 작가에게 이 벽면은 ‘특별히 애착이 가는 나의 작업 도구’인 셈이다.
“제가 작품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니라 한 작품에 한 달은 걸려요. 그러면 같은 그림을 한참 걸어두고 바라보게 되는데 작품을 완성하면 그림을 딱 빼는 순간이 오잖아요. 그때 이 벽면이 마치 ‘빈 도화지’처럼 느껴지면서 새로운 설렘 같은 게 생기는 거죠. 빈 벽면을 또 어떤 그림으로 채울까 생각하며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이게 내 그림" 확신 갖게한 작품
회화 외길…나만의 작품 '존재감' 고민
'밤과 플래시와 소녀' 완성때 잊지못해
어린 시절 회화에 빠진 후 그림 외길 인생만 걸었던 작가이지만 계속 그림을 그려야 할까를 깊이 고민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작가는 대학 졸업을 앞둔 무렵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은 ‘나만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했다”고 기억했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가 있고, 또 수많은 작품들이 있는데 내가 그린 그림이 존재감을 가지고 그 안에서 스스로 생동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던 것이다.
풀기 힘든 고민을 안고 그림을 그려가던 어느 날 새벽 하나의 작품을 완성했다. ‘밤과 플래시와 소녀’라고 이름을 붙인 작품을 두고 작가는 ‘이게 내 그림이다’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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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가 선보이는 작품들과 많이 달라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지금 작품이 담고 있는 특성들 하나하나가 이 그림에 모두 들어 있어요. 클로즈업한 소녀의 얼굴이라거나 한밤에 플래시를 켜서 비춘 듯한 빛과 같은 것들. 한두 시간 집중해서 그린 단순한 그림인데 이걸 완성한 그 새벽 밤 너무 기분이 좋고 마음이 들떠서 ‘아, 이제 나도 작가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SNS 속 또래여성 사진을 회화로
밝은 부분은 물감이 아닌 여백으로
수채화 기법 쓴 유화로 정체성 완성
방향을 찾은 이후로는 디테일을 만들고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을 차근차근 밟았다. 그렇게 완성한 작가의 ‘인장’은 또래 여성들의 사진을 회화라는 매체로 재구현한 일종의 초상화로 구현됐다. 캔버스에 유화물감을 쓴 작품이지만 그림의 가장 밝은 부분을 흰색 물감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두는 수채화 기법을 적용해 ‘수채화와 같은 유화’라는 어떤 이질감, 어쩌면 작가만의 정체성이라고 할 법한 표현을 완성했다.
피사체를 선택하는 방식도 작가의 시그니처로 거론된다. 작가는 실제 모델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익명의 얼굴을 선택해 그림을 그린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사진들 속에서 작가는 ‘내 작업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는 스토리를 입힐 수 있는 얼굴들’을 찾는다. 작가는 “인스타그램 속 사진들에는 게시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여러 장치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며 “그들이 숨겨 놓은 여러 재밌는 요소들에 나의 이야기를 담으려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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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을 선택하는 과정은 철저히 비대면이다. 마음에 드는 얼굴을 발견하면 사례비를 낸 후 사진을 그릴 권리를 구입하는 식이다. 이 방식을 두고 현대사회 속 소외를 보여준다는 해석도 하지만 정작 작가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그는 “어느 시대의 화가든 본인의 삶에서 가장 익숙한 지점에서 그려야 할 만한 소재나 장르를 찾곤 했다”며 “내게는 그리고 싶은 이미지를 가장 손쉽고 익숙하게 찾을 수 있는 지점이 웹이자 소셜미디어였고 그곳에서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피사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했다.
화가가 그리는 우리 시대의 얼굴들
이달 英런던서 첫 개인전 열어
"더 성장해 세상을 놀라게 할것"
이목하는 자신을 이제 막 세상과 만나 진화하기 시작한 화가로 규정한다. 그동안 자신만의 작업에 천착했다면 최근 다른 아티스트의 작품에 참여하고 그룹전 등을 시작하며 내 그림 옆에 다른 작가의 작품이 걸리는 경험을 많이 해나간다고 했다. 이달에는 해외 갤러리와 손잡고 영국 런던에서 첫 개인전을 진행하면서 현지 매체로부터 ‘떠오르는 유망주’로 주목받기도 했다.
관람객들과의 관계도 현재 진행형이다. 작품이 작가의 손을 떠나 누군가를 거치고 또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내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자아가 생겨 스스로 돌아다니는 느낌처럼 묘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특히 캔버스를 통해 관객들과 정확하게 소통하는 경험은 언제나 경이롭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의도했던, 혹은 내가 품었던 생각들이 온전히 전해질까라는 의심이 항상 있었어요. 가끔 블로그 등에 제 그림을 보시고 나의 생각이 이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는 글들이 올라오는데 그 감상이 제 생각과 온전히 맞아떨어질 때면 정말 기분이 좋아요. 내 마음이 정확히 전달됐구나.”
그러면서도 작업 과정의 디테일은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으면 한다. 작가는 “유화로 수채화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캔버스도 종이 질감을 내도록 많은 작업들을 하고 있다”며 “그림의 의미는 알아도 내가 손으로 그림을 만들어낸 과정들을 정확히 맞춘 사람은 아직 없는데 앞으로도 계속 사람들을 깜짝 속이고 싶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