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자유실현한
탈인습적 세대 등장
가장 큰 성장 잠재력
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거리, 붉은 티셔츠를 입은 시민들이 흩어지지 않고 비를 맞으며 “대∼한민국”을 외쳤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미국과의 조별리그 경기가 열리던 날이었다. 경기는 1-1 무승부. 하지만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를 청소하고 돌아갔다.
“‘붉은’색에 대한 오래된 공포를 벗어난 ‘붉은 악마’의 등장, 자유롭고 열정적인 세대의 성장이 너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지난달 15일 서면으로 만난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해방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2002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을 꼽았다. 1945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난 그는 대한민국과 같은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남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독일 빌레펠트대 연구교수를 거쳐 1981년 서울대 교수가 됐다.
한 교수는 해방둥이로서 광복의 의미를 특별하게 해석했다. 한 교수는 “광복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를 이끄는 큰 빛을 내포한 개념”이라며 “서구의 계몽주의도 ‘빛’의 개념에서 비롯됐듯이, 우리에게 ‘광복’은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문명의 새로운 비전을 탐색하고 체계화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중국 명문 남경대에 지난달 20일 ‘유교와 새로운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해 소장으로 취임했으며, 앞으로 활발한 국제 연구활동을 이끌 계획이다.
특히 한 교수는 광복의 진정한 의미를 ‘자유의 실현’으로 보았다. 그는 “광복은 아직 미완의 상태”라면서도 “지난 80년간 가장 잘 구현된 광복의 의미는 개인의 자유 실현”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02 한·일 월드컵은 자유와 열정을 지닌 젊은 세대가 한국의 시민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됐음을 보여줬다”고 덧붙였다.
1980년대 ‘중민이론’을 주창하며 한국 사회과학계를 대표하는 진보 학자로 자리매김한 한 교수는 한국 사회의 발전 원동력으로 ‘자신감의 획득’을 꼽았다. 한 교수는 “빈곤과 전쟁, 독재를 극복하는 역사의 고비를 거치면서 국민이 터득해 간 자신감이 원동력이 됐다”며 “박정희 시대를 거치며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고, 1980년대엔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신감을, 그 뒤로는 ‘디지털 선도주자’로서의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한 교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성취는 한류와 K문화의 세계적 확산에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탈인습적인 세대의 등장과 확산이 한국의 가장 촉망받는 미래 동력”이라며 “이것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앞으로도 전진할 수 있고 역사의 퇴보를 막을 수 있다”고 평했다.
한 교수는 최근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혼란스러워진 정국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광복 80주년의 정치일정은 탄핵정국으로 특징된다”며 “탄핵열차는 출발했지만, 종착역에 도착하는 과정과 그 이후는 고도의 불확실성과 긴장으로 휩싸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와는 달리 현재는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이 드물다”며 “책임윤리로 나라를 이끌 정치 리더십의 빈곤이 큰 문제이지만, 그 밑바닥의 구조적 원인은 소통부재, 흑백논리, 약육강식의 정치문화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 교수는 현재의 정치 위기가 단순히 제도 개선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렵다고 봤다. 그는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해 개헌을 하고 대통령 중심 체제를 바꾼다고 해서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근원이 치유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말했다. 자칫하면 더 큰 해악이 나올 위험도 있다. 대신 그는 “광복의 실현을 위한 소통시대의 개막이 필요하다”며 “이런 눈으로 탄핵정국의 전개와 미래를 보는 것이 광복 80주년의 의미”라고 강조했다.
소통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 한 교수는 ‘소통정의’를 제시했다. 그는 “탄핵열차는 법률적 규정과 과정을 따라 진행하겠지만, 이를 둘러싼 사회적 공론이 잘못한 이를 처벌하고 정치적으로 매장하는 데서 끝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보았다. 문제의 근원인 배타적 정치문화를 극복하려면 “징벌적 정의 못지않게 소통정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한 교수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한·일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 교수는 “일본을 가해자로 고착시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피해자로서 우리가 일본 역시 피해자의 입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대승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며 “그 차원에서 상호이해와 협력연대의 기반을 확충해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예림 기자 yeah@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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