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료 공백은 단순히 의료진의 숫자나 병상의 부족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특히 농어촌을 비롯한 읍·면 지역에서의 의료 공백은 인구 감소, 고령화, 의료 인프라의 지역 불균형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러한 현실 타개 방안으로 ‘비대면 진료 확대’와 ‘편의점 의약품 품목 확대’를 주요 정책 카드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과 편의성을 앞세운 이 같은 방안이 과연 실제 현장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효성 있는 대책인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편의점 상비약 10년’과 뚜렷한 한계
지난 7월 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약준모)이 전국 읍·면 지역 거주자 5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건의료 수요조사 결과는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 방향과 지역 주민의 현실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응답자의 58.8%가 편의점 의약품을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이 없다고 답했으며, 60대 이상에서는 그 비율이 79.2%에 달했다. 이는 10년 넘게 운영된 편의점 상비약 제도가 실제 의료취약지에서 기대한 접근성 개선 효과를 거의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앱 기반의 비대면 진료에 대한 수용성도 현저히 낮았다. 전체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스마트폰 앱을 활용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비대면 진료를 이용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는 5.2%에 불과했다. 특히 60대 이상 고령층에서는 2.5%만이 이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지 디지털 기기 활용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접근 방식을 고령층이 어떻게 인식하고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많은 고령자에게 병·의원과 약국, 보건소는 여전히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제공처이며, 단순한 기술적 편의성이 이를 대체할 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읍·면 지역 고령층의 다제약물 복용 문제다. 이들은 대개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 골다공증, 퇴행성 관절염 등 복합적인 만성질환을 동시에 앓고 있으며, 하루에 5~7종 이상의 약을 먹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처럼 복잡한 약물 복용 관리가 필요한 고령층에게 비대면 진료는 ‘편리한 선택’이 아니라 ‘위험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복약 순응도를 높이고 부작용을 예방하며, 중복 처방이나 약물 상호작용을 점검하는 일은 기존 지역에서 환자와 지속적으로 대면하고 환자의 약력에 대해 충분히 이해를 한 숙련된 약사의 약료 행위가 수반될 때 비로소 실현 가능하다. 그러나 비대면 진료에서는 이처럼 섬세하고 입체적인 약물 관리가 불가능하거나 형식적으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다제약물 복용으로 인한 저혈당, 신기능 저하, 간 손상과 같은 중대한 부작용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아진다.
또한 조사에 따르면 읍·면 지역 주민들이 일상적인 건강 문제를 해결할 때 실제로 가장 많이 찾는 의료기관은 약국, 병·의원, 보건소였다. 이들 시설은 대체로 거주지에서 10분 이내에 있었던 반면 응급실은 30분 이상 소요된다는 응답이 30%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격으로 연결된 서비스가 과연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데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역 내 기반 의료기관의 폐쇄와 축소는 오히려 건강 형평성을 악화시킬 위험이 크다.
정책 수요는 오히려 뚜렷하다. 응답자의 56.4%가 공공병원 설립을, 48.6%가 공공약국 설립을 보건의료 정책 우선순위로 꼽았다. 반면 비대면 진료 확대나 편의점 의약품 확대를 선택한 응답자는 각각 20.7%, 29.7%에 불과했다. 이러한 결과는 ‘편리성’보다는 ‘신뢰성’, ‘원격 연결’보다는 ‘실제 대면’을 중시하는 지역 주민들의 인식을 반영한다. 이는 단지 기술 수용성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권을 지키기 위한 생존 전략에 가깝다.
비대면 진료로 지방에선 의료 불편과 고립 가속
이러한 방향성의 오류는 단지 정책의 비효율성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비대면 진료가 확대되고 민간 플랫폼 중심 구조가 강화되면 지역 병·의원과 약국의 수익 구조가 붕괴하고, 이는 결국 폐업과 의료 인프라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처럼 은행 지점이 사라지면 고령층의 금융 접근성이 떨어지고, 기차역과 버스 터미널이 축소되면 교통 취약계층이 고립된다. 택시 호출 플랫폼이 활성화되면서 전화로 택시를 부를 수 없는 고령자들이 이동 자체에 어려움을 겪는 현상은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진료와 예약이 비대면 앱을 통해서만 가능한 구조가 자리 잡게 된다면, 그 불편과 고립은 오롯이 의료취약지 주민들의 몫이 된다.
게다가 현재 비대면 진료 시장은 민간 플랫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으며, 이 플랫폼의 상당수가 결국 외국 자본에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근 국내 배달 앱 플랫폼이 외국계 자본에 매각되면서 1조원에 가까운 수익이 해외로 유출된 사례는 단지 경제적 손실에 그치지 않는다. 의료 플랫폼이 같은 경로를 밟게 될 경우, 국민의 건강정보가 통째로 해외 서버에 저장될 수 있으며, 이 데이터가 상업적·정치적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생긴다. 의료 데이터는 소비 패턴이나 위치정보보다 훨씬 더 민감한 개인정보이며, 이는 국민의 건강권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기술의 발달이 곧 공공성의 해체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이제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의료취약지의 의료 공백을 채우는 데 필요한 것이 단순히 특정 계층의 편의성만 확대된 빠른 기술인지, 아니면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까지 공평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보건 의료인지. 읍·면 지역의 고령층은 화려한 앱보다는 자신의 질환과 복용 약을 기억해주는 약국 약사와 지역의 의료인들을 더 신뢰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다. 의료는 단순한 서비스가 아니라 생존의 기반이며, 국민의 건강권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이다.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정책의 방향은 분명해야 한다.
비대면 진료와 편의점 의약품은 생존의 여부가 결정되는 중차대한 위기상황에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땜질식 의료체계를 강화한다고 하더라도 구급차 안에서 치료받을 병원을 찾아 몇 시간씩 헤매는 의료취약지 국민의 생명을 지킬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결국 공공병원 공공약국과 같은 오프라인 기반의 공공의료 인프라 강화, 지역 밀착형 보건 시스템의 재건, 의료인력의 지역 배치와 교육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 고령자와 취약계층의 목소리에 기반한 정책 설계가 그 해답이어야 한다.

<박현진 약사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회장·약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