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조선시대 '어벤저스'⋯동학농민혁명 숨겨진 영웅은

2025-05-10

11일 반봉건·반외세 가치 내건 한국 최초 민중항쟁, 동학농민운동 131주년

동학군 선봉장 차치구 장군 숨은 조력자 최재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록

프랑스에 봉건 제도의 린 ‘프랑스 대혁명’이 있다면 한국에는 항일 전쟁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된 ‘동학농민혁명’이 있다. 현대 촛불 운동의 전신이나 다름없는 한국 최초의 민중항쟁, 동학농민혁명이 131주년을 맞았다. ‘동학농민혁명’ 하면 먼저 녹두장군 전봉준과 그와 뜻을 함께하는 민중의 비장한 얼굴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봉준의 이름과 달리 함께하는 민중의 이름은 쉽게 떠오르지 않는 실정이다. 전북일보가 동학농민혁명 131주년을 맞아 역사 속 숨겨진 영웅 이야기를 소개한다

동학농민혁명은 19세기 초 반봉건·반외세의 가치를 내걸고 일어난 민중항쟁이다. 당시 민중은 부패한 봉건 사회 지도층과 외세의 조선 침략에 대항해 들고 일어섰다. 억압과 폭정에 억눌려있던 민심이 폭발한 시작점은 지금의 정읍시인 전북자치도 고부였다. 1894년 초, 고부의 군수였던 조병갑이 탐관오리로서 온갖 폭정을 저지르자 전봉준을 필두로 들고 일어선 민중이 그를 몰아내고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만석보는 조병갑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해 만든 보로 그동안 농민에게 상당한 규모의 물세를 받아왔다.

이후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임시 파견 관리 이용태를 파견해 사건을 수습하고자 했으나 이용태는 사건을 일으킨 농민들을 동학교도로 몰며 억압을 이어갔다. 이에 1894년 9월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해 대규모 농민군을 형성했다. 그러나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었던 그들은 이어진 1차, 2차, 3차 봉기에서 패배하며 후퇴를 거듭했다.

그해 말 전봉준이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자 그와 뜻을 함께하던 민중들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전봉준을 순창 피노리까지 안내한 동학군의 선봉장 차치구 장군 또한 쫓기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차치구는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정읍군 소성면 광주골에 위치한 그의 친우 최재칠의 안내로 근처 산속에 은신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1893년, 전봉준은 차치구를 찾아와 동학군 선봉장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차치구가 이를 완강히 거절하자 전봉준은 그의 친우 최재칠을 찾아가 설득을 부탁했다. 최재칠의 간절한 설득으로 차치구는 동학교도로 입적하지 않는 조건으로 선봉장 자리를 승낙했다.

당시 최재칠은 독자로 태어나 노부모를 모시고 어린 아들과 사는 탓에 출정하지 못했다. 대신 자신의 삶터인 광주골에서 대나무 죽창 1000개를 깎아 차치구에게 전달했다. 그 결과가 차치구 장군의 피신으로 이어지니 최재칠은 가족들도 모르게 은신처를 마련해 그를 한 달 동안 보호해 행동에 책임을 졌다.

그러던 중 차치구 장군과 절친인 최재칠을 의심한 지방 관료 윤석진이 집을 급습해 그를 붙잡아 고문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끝없는 고문에도 최재칠은 차치구의 은신처를 발설하지 않았지만, 이를 보다 못한 차치구가 스스로 나와 붙잡혔다. 그러나 격분한 윤석진은 일본군 입회 참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치구 장군을 그 자리에서 즉결 처형하고 만다. 최재칠 또한 죽음을 직감하고 있던 때, 그들의 우정에 감읍한 일본군 입회 참위가 호의를 베풀어 참형을 면하게 되었다.

현재 차치구와 그의 친우이자 조력자였던 최재칠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돼 있다. 이들을 비롯한 독립운동·민중항쟁 역사 속 인물들의 숨겨진 이야기는 그들의 주변인·후손의 구술을 하나의 책으로 엮은 <원군교를 감시한 어느 한국인 순사의 증언>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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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채연 mcy0003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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