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代가 독립운동에 투신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5-10

1868년 경기 용인에서 태어난 오인수(吳寅秀)는 어릴 때부터 명포수로 이름을 떨쳤다. 포수들끼리 모여 사격술을 겨루는 시합이라도 열리면 늘 1등을 차지했다. 그가 30대 후반이던 1905년 제국주의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빼앗는 이른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들이 떨쳐 일어선 가운데 오인수도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3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경기 남부 일대에서 일본의 헌병대와 경찰서 등을 습격했다. 1907년 일본군에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8년간 복역한 뒤 풀려났다. 이후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5년 별세했다.

의병장 오인수의 아들이 바로 오광선(吳光鮮)이다. 1896년 용인에서 태어난 그는 의병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아버지와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독립군 장교가 되었다. 저 유명한 청산리 전투(1920)에 참전한 것을 비롯해 10여년간 만주 지역에서 일본군과 숱한 교전을 벌였다. 1933년에는 지청천 총사령관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중대장으로서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되자 오광선은 대령 계급장을 달고 육군에 투신했다. 6·25 전쟁 기간 여러 부대의 지휘를 맡아 큰 공적을 세워 장군(준장)으로 진급했다. 전후인 1956년 전역한 그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1962)을 수여했다.

오광선에게는 희옥(姬玉)과 희영(熙英) 두 딸이 있었다. 1926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희옥은 언니 오희영과 더불어 부친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10대 소녀의 몸으로 1941년 광복군에 입대한 그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첩보 공작과 광복군 대원들의 사기를 드높이기 위한 문화 활동에 주력했다. 이는 언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남들 같으면 공부를 하거나 연애를 즐길 시기에 자매는 청춘을 조국에 바친 셈이다. 정부는 1990년 당시 64세이던 오희옥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아울러 동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오희영에게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전쟁기념사업회(회장 백승주)가 ‘5월의 호국 인물’로 오광선 지사를 선정하고 지난 8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현양(顯揚) 행사를 열었다. 유족을 대표해 고인의 외손자인 김흥태 용인독립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참석했다. 김 이사장은 “증조할아버지(오인수 지사), 할아버지(오광선 지사), 저희 어머니(오희옥 지사)까지 3대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자랑스러운 집안의 후손으로서 앞으로도 독립운동가 현양 사업에 적극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엄혹했던 시절에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국민 모두가 이 자랑스러운 가문을 길이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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