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생의 마지막 순간 먹고 싶은 음식

2025-05-22

어릴적 아버지 장례식장서 맛본

고사리 해장국 아직도 못 잊어

美선 사형수에 음식 주문해줘

맛 중에 가장 센 건 엄마의 손맛

내 인생 최고의 국밥을 얼마 전 순천 웃장에서 만났다. 잡내 하나 없이 얼큰하고, 시원하고, 식감도 끝내주는, 완벽에 가까운 국밥이었다. 국밥을 두 그릇 이상 주문하면 서비스로 수육이 나오는 집이었는데, 이게 또 환상의 킥이었다. 공짜인데 양은 왜 이리 푸짐한지. 맛은 또 어찌나 기막힌지. 후덕한 인심이 배 밖으로 나온 식당이구나, 감탄사를 연발하며 쉬지 않고 젓가락질했다.

그렇게 술은 서너 잔만 마셔야지, 했던 결심은 베를린 장벽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마침,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서 남도의 소주 잎새주가 더욱 달게 느껴졌다. 지인 중 한 명은 이 국밥을 먹기 위해 날을 잡아 다시 순천에 내려오겠노라 했고, 누구도 그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 의지를 설득하는 황송한 맛이었으니까.

살다 보면, 순천의 국밥처럼 잊지 못할 음식을 만나곤 한다. 내겐 제주도 고사리 해장국이 그중 하나다. 제주도 고사리는 연하고 부드러워 해장국으로 만들며, 이것이 으깬 고기인지 나물인지 헷갈릴 정도로 혀에서 보드랍게 감긴다. 나는 제주도 고사리 해장국 맛을 ‘하필이면’ 아빠 장례식장에서 깨달았다. 구석에 처박혀 풀 죽어 있던 어린 나에게 어른들이 억지로 먹인 고사리 해장국. 먹는 시늉만 하고 말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느끼고 만 것이다. 혀에서 터지는 엄청난 맛을. 고사리 해장국 덕분에 나는 장례를 치르는 동안 기운을 차렸지만, 동시에 죄책감도 얻었다. 슬픈 상황 속에서도 살아 있는 내 미각을 원망하며.

장례식 음식 중 인상적으로 남은 또 하나는, 친구 어머니 장례식에서 만난 냉면이다. 장례식장에 냉면? 육개장 같은 따뜻한 국물 요리가 아니라? 알고 보니 고인이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손님을 집으로 초대할 때마다 차려낸 그녀의 시그니처 메뉴라고도 했다. 당신의 마지막을 위해 모인 분들에게 냉면을 대접하고 싶다는 뜻을 고인이 여러 차례 피력했다는데, 자식들은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허투루 듣지 않고 실천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냉면을 먹는 조문객들의 입가는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가엔 하나같이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물 젖은 냉면을 먹어 봤는가.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2007)에서 주인공 사치에(고바야시 사토미)는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날, 좋아하는 사람들을 불러 좋은 재료로 만든 맛있을 음식을 대접하며 성대한 파티를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날 내가 먹은 냉면은 그런 음식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장례식 냉면은 내 인상의 소중한 한 끼로 남았다.

내친김에 인생 ‘최후의 만찬’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자. 미국의 몇몇 주에는 사형수가 죽기 전 원하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고 한다. 뭔가 대단한 걸 주문할 것 같지만 사형수들이 꼽는 건 흔한 음식들이다. 치즈버거, 스테이크, 프라이드치킨 같은. 왜 그럴까. 음식은 ‘맛’ 외에도 순간의 ‘추억’을 저장한다. 아마도 그들이 선택한 건 ‘그냥’ 치즈버거가 아니라 누군가와 먹었던 치즈버거, 물리적인 허기를 채워 준 ‘그냥’ 스테이크가 아니라 마음의 허기를 채워줬던 스테이크였을 것이다. 행복한 순간을 함께한 음식들 말이다.

추억의 맛 중에 가장 강력한 맛은 단언컨대 엄마의 ‘손맛’이다. 손맛의 특징은 말 그대로 만드는 사람의 손에 따라 개성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맛은 절대적이다. 많은 사람이 죽기 전 먹고 싶은 음식으로 엄마가 어릴 적 해줬던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체가 불가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수많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가 있다지만 사실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온리 원(only one) 김치찌개·된장찌개’가 존재할 뿐이다. 이걸 명명할 만한 적당한 단어는 ‘소울 푸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묻게 되는 말. 당신의 소울 푸드는 무엇인가요.

정시우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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