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터] 분쟁과 기후위기, 빈곤의 지형도를 바꾸다

2024-12-18

국제구조위원회 ‘남수단 종자안보 프로젝트’

바키타(29)는 만삭의 임신부였다. 남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집 근처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을 든 군인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며 식량과 물건을 약탈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바키타는 피난을 떠나기 위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네 명의 아이들이 입을 옷부터 챙겨 넣었다. 남편의 옷은 넣지 않았다. 국경까지 안전하게 도착하려면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가족은 여섯명인데 5인분의 비용밖에 없었다. 남편은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올해 2월의 일이다.

지난해 시작된 수단 내전이 격화하면서 3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인접 국가로 탈출했다. 바키타는 브로커에게 남수단으로 향하는 버스비를 지불했다. 험난한 길이었다. 브로커가 연결해 준 버스는 산 중턱에서 고장이 나버렸다. 만삭의 몸으로 아이 넷을 챙기며 걷고 뛰었다. 힘든 것보다 두려운 마음이 컸다. 검문소에 도착할 때마다 군인들은 가지고 있던 모든 짐을 펼쳐놓게 하고 일일이 검사했다.

남수단 국경지대인 랭크(Rank)에 이르자, 더는 폭격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비로소 ‘살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키타는 랭크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갓 태어난 막내까지 다섯명의 아이를 데리고 아종톡(AjuongThok) 난민캠프에 도착했다. 문자 그대로 무일푼이었다.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게 기도하겠다. 신께서 당신과 아이들을 지켜주길.” 남편의 마지막 인사가 떠올랐다. 먹고 사는 전쟁이 시작됐다.

빈곤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빈곤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였지만, 최근에는 ‘분쟁’과 ‘기후변화’가 빈곤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달 초 국제구조위원회(IRC)와 함께 분쟁과 기후변화라는 이중재난을 겪고 있는 남수단을 찾았다.

식량 배급 대신 농사 선택한 사람들…미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바키타가 웃었다

남수단 수도 주바(Juba)에서 북동쪽으로 약 800km에 위치한 잠장카운티(Jamjang County)에는 내전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수단 사람들이 지내는 두 개의 거대한 난민캠프가 있다. 하나는 아종톡 캠프, 다른 하나는 파미르(Pamir) 캠프다. 두 캠프의 인구를 합하면 10만명이 넘는다.

빈몸으로 이곳에 당도한 난민들은 구호단체의 식량 지원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간다. 바키타와 다섯 아이들도 처음에는 세계식량계획(WFP)이 배급해주는 음식으로 버텼다. 양이 부족해서 아이들이 늘 배고파했다. 그나마도 2~3개월 후에 지원이 끊겼다. 그때부터는 수단에서 가져온 옷을 시장에 하나씩 내다 팔아서 음식을 마련했다.

어느 날 국제구조위원회 직원들이 바키타를 찾아왔다. 농사짓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7월 27일 씨앗을 심었고 11월에 동부콩을 수확했다.

“처음 한 농사치고는 잘된 것 같아요. 양이 많진 않은데 우리 가족이 먹기엔 충분해요. 품질도 좋아요. 엄마가 기른 콩을 아이들도 자랑스러워합니다.” 잘 웃지 않던 바키타가 콩 이야기를 할 때는 웃었다.

난민의 자립을 돕기 위해 국제구조위원회가 찾은 솔루션은 ‘농업’이었다. 식량 배급에 의존하는 불안한 삶에서 벗어나려면 직접 농사를 지어 식량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 2016년 ‘종자안보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기후변화에 강한 종자를 선택해 생산, 보급, 유통하는 프로젝트다. 주요 작물은 수수, 동부콩, 땅콩 등 세 가지. 어떤 작물을 심을지는 농부들이 결정했다. 토지 준비, 파종, 해충 관리, 수확물 저장 등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농사 기술도 전하고 있다.

잠장카운티에서는 총 6400명의 농부가 ‘종자안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경작 중인 농지 크기를 모두 합하면 1만 페단(4200만㎡)에 달한다. 알도(Aldo) 국제구조위원회 잠장사무소 농업담당자는 “일반농부에게는 1페단(60m?70m)씩, 선도농부(lead farmer)에게는 3페단씩 농사지을 땅을 나눠주고 있다”면서 “1페단이면 가족 5명이 먹고 살 수 있는 수확물이 나오기 때문에 난민들의 식량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농업을 통해 ‘평화’를 배우다

난민캠프 주민은 대부분 여성과 아이들이다. 아종톡 난민캠프에서 여성 농부들이 직접 운영하는 ‘마을저축 및 대출협회(VSLA)’ 사무실을 방문했다. 사무실이라고 하지만 난민캠프 내에 있는 작은 집이다. 여성농부 20여명이 시장에 내다 팔 땅콩과 천연 방향제를 정리하고 있었다.

VSLA는 한국의 ‘계모임’과 비슷하다. 협회에 가입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저축해 기금을 만들고 이걸 작은 금고에 담아 보관한다. 돈을 대출하고 싶은 여성은 간단한 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해야 하며 회의를 통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대출이 실행된다. 금리는 10%다. 이자로 번 돈은 회원들이 나눠 가진다. 여성 농부들이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운영한다.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고 조정하는 힘도 농업을 통해 길러낸다. 국제구조위원회는 난민(수단)과 지역사회(남수단) 농부 대표 48인으로 구성된 농민평화상생위원회(APC)를 통해 ‘종자안보 프로젝트’가 평화적으로 운영되도록 돕는다. 제한된 자원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충돌을 막기 위해 토지 할당 문제나 농민 간 분쟁을 함께 모여 의논하고 조율한다. 이은영 국제구조위원회 한국 대표는 “가난은 평화의 부재에서 온다”며 “분쟁이 있으면 경제적으로 안정이 돼도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적 의사소통과 평화유지의 중요성을 계속 학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

남수단은 2019년부터 반복적인 대규모 홍수를 겪고 있다. 기후변화로 강우량이 급격하게 증가한 게 원인이다.

잠장카운티는 원래 우기가 짧고 비가 적게 오는 지역이었지만 2020년부터는 홍수 지역으로 바뀌었다. 2020년 10월, 2022년 10월, 그리고 올해 8월. 세 차례 큰 홍수가 발생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파미르 난민캠프에 사는 메리(47)는 “2022년에도 홍수 때문에 피해를 봤는데, 올해도 수수가 전부 다 물에 잠겼다”면서 “조금 남아있는 곡식으로 다음 수확 전까지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남수단 사람들에게 수수는 주식이다. 보통 9월과 1월, 두 번에 걸쳐 수수를 수확한다. 남수단을 방문했던 12월 초는 원래 수확철이 아니었지만, 파미르 농장에서 수수를 수확 중인 농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홍수 피해를 입어 수수를 아예 심지 못했던 농장에 단기작물인 ‘가다마맘’을 심었다고 했다.

박연경 국제구조위원회 한국 홍보매니저는 “홍수는 막을 수 없지만, 피해를 본 주민들이 기후변화에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할 수 있다”면서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알려주는 게 국제구조위원회가 하는 일”이라고 했다.

알도 국제구조위원회 잠장사무소 농업담당자는 “인도적 지원에 의존하던 시기에는 주민들이 아무것도 계획하지 못했다”면서 “주면 먹고 안주면 굶는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농업을 하면서 달라졌다. 수확한 농작물을 몇 개월에 걸쳐 먹을지, 남은 것은 어떻게 할지, 다음에는 뭘 더 심을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기후변화, 분쟁, 인플레이션 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지만, 남수단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느리지만 분명히 변하고 있습니다”

트랙터 기부자 찾습니다

식량 배급에 의존하던 남수단 난민캠프 주민들이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국제구조위원회는 내년 4~5월 트랙터로 1만 페단(약 4200만㎡)에 달하는 농부들의 땅을 갈아줘야 합니다. 6월 파종 시기를 맞추려면 트랙터 2대가 더 필요합니다. 남수단에 트랙터를 선물할 기업이나 개인 기부자를 찾습니다.

기부 문의: 솔루션저널리즘센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농업, 위기국가 남수단의 솔루션이 되다

이은영 국제구조위원회 대표 인터뷰

직접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은영(47) 국제구조위원회(IRC) 한국 대표는 남수단 잠장카운티에서 수도 주바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2022년 대홍수가 났던 유니티주의 벤티우 주도가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물에 잠겨 있는 걸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이다. 홍수 지역이라기보다는 바다에 가까웠다. 망망대해 위에 작은 섬이 하나 떠 있었는데 ‘난민캠프’였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5~10분간 이동하는 만큼의 면적이 모두 홍수 지역이었다”며 “분쟁과 기후위기가 중첩된 남수단의 위기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세계위기국가’ 순위에서 남수단이 5위를 차지했다.

“세계위기국가는 국제구조위원회가 매년 12월 발표하는 리포트다. 인도적 위기가 더욱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들을 소개하는데, 수단·팔레스타인·미얀마·레바논이 순서대로 1~4위를 차지했다. 남수단은 지난해에 3위였는데 이번에 5위로 내려갔다. 상황이 나아졌다기보다는 워낙 심각한 곳들이 많아져서 순위가 밀렸다. 1위 수단은 작년에 시작된 전쟁이 악화되면서 민간 학살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1년간 남수단에 81만 명의 수단 난민이 들어왔다. 그전에 있던 27만 명을 포함해 총 약 110만 명이나 된다.”

수단 난민들을 직접 만난 소감은.

“대부분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목숨 걸고 국경을 넘어왔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생존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식량지원을 받고 있어도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형편이다. 인도적 지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먹고사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해 보였다. 국제구조위원회가 난민들에게 농업을 가르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농사기술을 가르쳐주는 게 인상적이었다.

“국제구조위원회를 ‘솔루션 NGO’라고 부른다. 솔루션을 잘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 중심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 지역이나 사람에게 어떤 게 중요하고 필요한지 잘 알아야 한다. 남수단의 ‘종자안보 프로젝트’를 보면 굉장히 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민들과 밀접하게 소통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국제구조위원회만의 ‘솔루션’을 만드는 씽크탱크가 있다고 들었다.

“‘에어벨임팩트랩’(Airbel Impact Lab)이라는 조직이 있다. 좁은 지역에서 작게 시도해 보고 작동이 되면 키우는 방식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실험한다. 남수단의 ‘종자안보 프로젝트’도 바로 에어벨임팩트랩에서 시작됐다. 남수단뿐 아니라 시리아·니제르·파키스탄 등지에서도 ‘종자안보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남수단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어땠나.

“평화롭고, 밝고, 강인하다는 느낌이었다. 또 굉장히 부지런한 것 같다. 전쟁 후 한국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마당을 쓰는 남수단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긴 했다.

“이번 출장에서 남수단의 가능성을 봤다. 연필 하나 공책 하나 귀하고 부족한 가운데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어떤 현장보다 따듯했고 응원하고 싶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남수단은 낯선 나라지만 가까이서 보니 우리나라와 참 닮은 점이 많았다. 우리와 닮은 남수단의 이야기에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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