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을 무찌르고 연합국의 승리를 일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젊은 시절 지독한 남녀 차별주의자였다.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 처칠은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처칠은 “부인들은 저마다 남편이 투표하는 정당 후보에게 똑같이 한 표를 던질 테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논리이겠으나, 그 시절만 해도 보수주의자들 중에는 처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이가 많았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영국은 1918년 먼저 30세 이상 여성의 투표권 행사를 허용한 데 이어 1928년부터는 모든 선거에서 성인 남녀의 완전한 평등을 보장하게 되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뒤 1948년 정부 수립 이전에 이미 ‘선거의 남녀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다. 신생 공화국인데다 1920년부터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해 온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은 나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남성보다 여성의 문맹률이 훨씬 높았던 1940년대 후반 ‘선거에서 여성이 과연 온전히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컸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5·10 총선을 1개월여 앞둔 1948년 3월27일 동아일보는 “우리 여성들은 교육 정도가 남성에 비해 떠러져(떨어져) 있으나 그 대신 우리 여성들에게는 자랑할 만한 단결력이 있다”며 여성 유권자들을 향해 가급적 여성 권익을 옹호할 후보자에게 표를 던질 것을 촉구했다.
‘부인은 남편의 투표 행태를 그대로 따라한다’라는 주장이 틀린 것은 분명하나, 남녀의 교제와 혼인에 정치적 성향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8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2023년 성인 남녀 39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 갈등과 사회 통합 실태 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 중 절반이 넘는 58.2%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과 연애·결혼 등을 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반드시 같은 정당이나 정파를 지지해야 커플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이가 대략 10명 중 6명꼴인 셈이다. 그럼 나머지 4명은 ‘교제나 혼인에 있어 정치적 성향은 전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불쾌하지만 참는다”거나 “아예 정치 얘기를 서로 하지 않는다”는 남녀도 제법 있을 듯하다.
미국 대선을 닷새 앞둔 10월31일 뉴욕타임스(NYT)가 눈길을 끄는 보도를 내놓았다.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인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막판까지 박빙의 경합을 펼치는 가운데 NYT는 “백인 여성 유권자들 가운데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해리스를 찍는 ‘사일런트(silent·조용한)’ 해리스 지지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2016년 대선 때의 ‘샤이(shy·수줍은) 트럼프’를 연상케 하는 ‘샤이 해리스’에 주목한 것이다. 미국 사회도 보수적인 트럼프를 지지하는 남편을 둔 부인이 그 앞에서 대놓고 “난 해리스가 좋은 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부부 간에 정치 얘기는 일절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지 모르겠다.
김태훈 논설위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