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2025-03-24

현진숙, 제주복식문화연구소장

예전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가 지은 ‘규합총서’가 생각이 난다.

당시 많이 놀랐고, 또 많은 울림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책이다.

가정 생활에 지침이 되도록 할머니가 정성스레 적어 놓았는데, 지금도 펼쳐볼 때마다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도 삶에서 얻은 지혜를 모은다면 또 하나의 규합총서가 될 수 있는데….’하는 생각이 숙제처럼 남았다.

노인 한 분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분들이 살면서 터득한 지혜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나온 말일 것이다.

규합총서와 같이 기록으로 남겨진다면 세월이 흘러도 만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함께 살아가던 한 세대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부모님에게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이야기도 어느 순간에 그분들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질 것이다. 우리 세대가 다리가 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단절되고 말 것들이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삶의 지혜들이다.

가정을 어떻게 해서라도 살려내려 애를 썼던 할머니와 어머니, 이제 나도 어머니에서 할머니가 됐다.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도 있지만 옷깃을 바로잡아 옷맵시를 가다듬듯이 삶을 가다듬게도 한다.

저 손주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물려 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말이 씨가 된다고 어머니들은 자식을 야단칠 때도 좋은 씨가 될 말로 하라 하셨는데 난 저 아이들에게 좋은 씨를 맺고 있는지. 잘살아보려고 버둥거리며 왔는데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이었는지, 더 부요해지고,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진 것이 내가 바라다보며 왔던 잘 사는 것이었을까? 그런 것이었다면 아마도 생을 다해도 도달할 수 없겠지. 욕망은 끝이 없는 것이니까.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 줄 씨앗은 열매를 생각해 보면서 버려야 할 씨앗은 과감하게 버리고 물려 줄 씨앗은 소중히 고이 싸서 발아 될 수 있도록 텃밭을 일구듯 삶은 일궈야 한다.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유산 덕분이다.

우리 아이들 인생 밭에도 물려받은 씨앗이 뿌려져서 발아돼 그 열매를 보며 다시 일어설 힘도 얻고 작지만 소중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기쁨을 맛보는 삶이 됐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다.

우리 어머니는 혼자서 우리 오남매를 부지런함과 절약함으로 키우셨다. 지금도 어머님의 부지런함을 쫓아갈 수는 없지만 어머니가 일궈 놓은 삶이 좋은 양분이 돼 나도 나태해질 때는 게으르지 말자고 되새기며 삶을 바로잡곤 한다.

게으르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삶을 닦다 보면 나의 삶도 조금씩 윤이 나겠지. 그 양분이 우리 아이들 삶에 스며들어 좋은 열매가 맺어지길 바라며 오늘도 삶을 일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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