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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이라는 논의 없이 (노동 개혁은) ‘정치판’처럼 느껴집니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덮친 올해 고용과 노동시장을 진단하기 위해 서울경제신문이 이달 14일 주최한 국내 노동 전문가 좌담회에서 ‘생산성 향상’과 ‘노동시장 경직성 해소’가 노동 개혁의 핵심 가치로 제시됐다. 민간의 고용 창출 능력을 중시하고 시장의 구조조정 능력을 믿으라는 과감한 제언들도 잇따랐다. 좌담회에는 권기섭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좌장으로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 원장,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원장, 최영기 한림대 겸임교수가 참여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고용 상황이 크게 위태롭다고 한목소리로 진단했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금융시장 충격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때보다 크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 침체와 건설업 부진, 급속한 고령화 등 시장을 억누르는 구조적 요인은 더 악화했다. 허 원장은 “올해 취업자 증가 폭이 예상과 달리 10만 명 선을 하회할 수 있다”면서 “올 1월에는 정부가 노력해 고용(실적)을 조금 끌어올렸는데 민간에서 고용을 끌어올릴 유인이 안 보인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노동시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급한 과제로는 계속고용(정년 연장, 퇴직 후 재고용)과 근로시간 유연성, 노동 개혁, 생산성 제고가 제시됐다. 허 원장은 “60세 정년 후 새로운 고용계약을 맺는 계속고용이 (방법론적으로)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며 “(계속고용은) 인구구조 변화를 대응하고 여성의 경제 참여율 제고라는 축도 건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속고용 논의를 위한 사회적 대화는 노동계 이탈로 멈춘 상황이다.
최 교수는 “임금, 노동시간, 노란봉투법(사용자 개념 확대, 노조에 과도한 손해배상 제한), 반도체특별법을 보면 여전히 ‘정치권’이 걸림돌이다”며 “여야가 이 이슈를 정쟁으로 삼아 타협보다 갈등을 조장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답답해했다. 조 원장은 “근로 후 임금은 컨트리뷰션(contribution·기여)으로 볼 수 있는데, 기여를 적게 하는 근로자와 (그렇지 않은 근로자가) 비슷한 보상을 받는 게 맞는 건가”라며 “나이, 학벌, 아부(친분) 등 제3요인으로 보상이 결정되면 나라 전체가 비생산적인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우리 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7개국 중 26위다.
노동시장 개선은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양극화 해소를 위해서도 절실하다. 현재 임금 격차는 대기업 정규직이 100을 벌면 중소기업 비정규직이 50~60을 벌 정도다. 임금체계 연공성이 강해 대기업 일자리 임금 수준이 높은데 이 일자리가 늘지 않는 악순환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정부와 시장·노사의 역할이라는 세 갈래 해법이 제시됐다. 최 교수는 “유럽은 최저임금과 노동 기준을 높여 산업 합리화를 촉진했다”며 “만일 우리가 이 유럽 방식을 하려면 기금 안에 영세 사업장, 자영업자, 근로자 5인 미만 사업장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원장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격차는 중국이 개방되면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부족한 중소 업체의 구조조정이 안 됐기 때문”이라며 “대형 쇼핑몰 진입 때 기존 상권과의 갈등처럼 경쟁력이 없는 곳에 (근로자를) 두는 일을 수십 년째 해왔다”고 짚었다. 시장 논리로 결정될 문제까지 정부가 일일이 개입해 역효과를 내는 게 없는지 살펴보라는 것이다. 허 원장은 노사가 나서 이익을 분배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사내 하청이 있는 산업은 더욱 원청 기업과 원청 노사 모두 책무성을 발휘해야 한다”며 “직무도 크게 다르지 않고 더 위험한 일을 하는 사내 하청의 임금이 원청의 60% 수준에 불과하면 (하청)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의 시대정신은 결국 “생산성을 높이며 저성장을 탈출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 원장은 “우리나라는 미국·일본과 달리 임금 결정 요인이 너무 잘 설명되는데, 소위 ‘간판’으로 생산성이 결정된다는 뜻”이라며 시스템적으로 생산성 산출이 어려운 구조를 재차 강조했다. 허 원장은 “헨리 키신저가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을 두고 한 발언처럼 자신이 의식하지 못해도 시대가 뒤집어질 수 있다”며 “성장을 추구하는 인물이 적절한 대책을 펴는 상황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법규는 자율성으로 움직이고 임금은 일한 만큼 공정한 뒷받침(보상)이 뒤따라야 한다”며 “우리 사회가 이견을 조율하는 합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