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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시기에
요구되는 리더십은
목표를 명확히 제시해
총력을 결집하게 하며
그 과정의 다양한 문제를
씨름하며 결단하는
행동지향형 실무 자세를
취하게 한다
12·3 친위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에도
위기 리더십이 존재한다
헌정 질서 회복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갈등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함으로써
이중권력 상태를 만든
집단리더십이 존재한다
작년 12·3 친위쿠데타가 실패한 지 석 달이 다가오지만 여전히 불투명한 헌정이 계속되고 있다. 검찰 측에서 그어놓은 내란의 테두리와 허들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내란의 ‘전체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있어 처방전을 발행할 수도 없다. 부역자들도 그대로 자리를 지킨 채 내란 극복을 위한 올바른 진단과 해법 찾기를 방해하고 있다. 내란 옹호 세력도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중국을 혐오하거나 부정선거를 계속 들먹이며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게다가 불투명함과 불안정성을 극복하려는 최상목 권한대행의 지도력이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 자신이 기회주의 보신으로 일관하며 진실 규명을 가로막고 있고, 갈등을 풀어갈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무작위(無作爲)는 리더십을 포기하고 자리 보존에 연연하는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결과적으로 위기를 조장할 뿐이다.
처칠, 위기의 지도자론
지금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리더십이 필요한 때이다. 역사에서 헌정 중단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지도력을 말할 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윈스턴 처칠이다. 그는 1939년 9월 폴란드 침략을 시작으로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를 이끈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처칠은 1940년 5월 영국 총리가 되었다. 나치의 전쟁 확대로 독일군은 4월에 덴마크·노르웨이를 공격한 데 이어 5월10일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를 침략하고 프랑스로 진격했다. 처칠은 그날 저녁 6시에 조지 6세로부터 정부 구성을 요청받았다. 그 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2순위 후보자였다. 나치의 확전이 그를 총리에 오르게 한 것이다.
처칠은 곧바로 경쟁 정당인 노동당과 연립내각을 결성했다. 그중 다섯 사람, 곧 자신과 함께 체임벌린, 핼리팩스 그리고 노동당의 대표와 부대표로 전시내각(War Cabinet)을 구성해 신속한 협의와 결정을 보장했다. 총력 대응의 시스템을 갖춘 처칠은 첫 의회 연설에서 결코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하는 게 전쟁의 목표임을 분명히 했다.
그럼에도 그는 정부와 의회 내에서 독자적인 지지 기반을 가진 정치가가 아니었다. 자신을 총리 후보로 추천한 보수당의 체임벌린 전임 총리는 여전히 당대표였다. 그는 1939년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간 서약서, 곧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종이 한 장을 흔들며 귀국해 ‘명예로운 평화’를 독일에서 가져왔다고 환영받았던 사람이다. 독일과 강화협상을 벌여 영국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유화론자들은 처칠이 총리로 취임한 즈음에도 있었다. 처칠보다 더 유력한 총리 후보였던 핼리팩스 외교장관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내각에서조차 이탈리아의 권익을 보장해 무솔리니를 움직여 독일과의 강화회의를 모색한 사람이다.
하지만 처칠은 속이 뒤틀린 악마이자 미치광이인 히틀러가 영국만의 안전을 보장할 리 없다고 보았다. 독일과의 협상도 그들의 정복을 인정하는 꼴이고, 그들의 노예임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5일간의 논쟁 끝에 핼리팩스의 외교노선을 거부했다. 이어 됭케르크 철수 작전을 성공리에 끝낸 처칠은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의원들 앞에서 천명했다.
이렇듯 총리로 취임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처칠은 의원들과 국민 사이에서 미증유의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 반대로 유화론자들은 비판 여론이 강해지고 있는 데다, 1940년 9월 독일 공군이 런던대공습을 시작하고 체임벌린도 이즈음 암으로 사망하며 영향력을 사실상 잃었다. 처칠은 핼리팩스를 주미 영국대사로 보냈고 왕족까지도 유화론자라면 전선과 떼어놓았다. 대신에 전쟁 지도를 위한 실무 위주의 결집력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인사 조치를 취함으로써 현장의 수많은 문제를 바로바로 처리할 수 있게 보장했다. 그러니 그의 긴장과 스트레스는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처칠, 승리 속의 선거 참패와 민주주의
처칠은 5년이 넘는 동안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배, 기차,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11만마일을 다녔다. 가본 도시만 해도 카이로 4번, 워싱턴과 모스크바 12번, 퀘벡 2번, 그 외 버뮤다, 테헤란, 카사블랑카, 파리, 노르망디, 아테네, 베를린, 얄타와 이탈리아, 몰타, 벨기에 지역 등으로 다양했다. 그의 마지막 해외 출장지는 1945년 7월17일부터 독일과 폴란드의 전후 처리를 협의하고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내기 위해 트루먼, 스탈린과 만난 독일의 포츠담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8월2일 포츠담회담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과 함께하지 못했다. 7월5일 실시된 전후 영국의 첫 총선에서 노동당에 참패했기 때문이다. 나치가 항복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때 치러진 선거에서 좌절한 것이다.
비록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얀마에서 영국군이 아직 일본군과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총선은 나머지 지역에서의 전쟁이 끝났기에 가능했다. 선거 결과는 해외의 군인 투표까지 최종 집계하는 데 3주 정도 걸려 7월26일 아침에서야 공식 발표되었다. 보수당 의석이 약 190석 줄고, 노동당이 242석이 늘었다. 포츠담회담에는 처칠 대신 노동당 대표이자 신임 총리인 애틀리가 참석했다. 그래도 세상은 포츠담회담에 참석한 3국의 원수를 말할 때 처칠이 들어간 사진을 떠올린다.
아무튼 처칠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선거 결과였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고 영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청중은 유세 현장에 그가 나타날 때마다 영화 스타 대하듯이 환호했다. 보수당도 그의 인기 덕분에 승리를 확신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국 국민은 보수당에서 말하는 자유의 향유를 통제에서 벗어난 해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이전의 무자비한 계급사회 또는 약육강식의 사회로 돌아가는 구실로 간주했다. 그리되면 전쟁 때처럼 국가가 직장을 주고 어린이용 우유를 배급하는 안정된 삶과 복지가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결국 선거 결과는 전전(戰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국민의 의사 표현이었다.
처칠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위로한답시고 “국민이 얼마나 배은망덕한지 절대적으로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했다. 그럴 때 처칠은 “그게 정치야, 그게 정치라고” 하거나, 배은망덕이란 말의 사용을 거부하며 국민도 “아주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고 말했다(강성학 <윈스턴 S. 처칠>). 그는 결코 국민을 탓하거나 부정선거를 말하지 않았다.
처칠 부인도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위장된 축복”이라며 그를 위로했다. 사실 그랬다. 71세까지 5년 동안 쌓인 긴장과 스트레스로 건강이 무너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처칠도 1945년 말에 고백했다. 선거에서 승리했다면 자신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처칠은 하원의원직을 유지하며 몸을 추스르는 한편 여섯 권에 4200쪽이 넘는 <제2차 세계대전>이란 회고록을 간행했다. 루스벨트, 히틀러, 무솔리니는 죽었고, 스탈린은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으니 각종 정부 문서와 자신의 메모 및 경험을 녹여 정리한 이 책의 가치는 매우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회고록은 1967년 관련 문서의 일부가 공개되기 시작할 때까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해 건드릴 수 없는 공식 해설서나 마찬가지였다. 처칠은 1953년 이 책 등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위기의 시기에 요구되는 리더십은 목표를 국민에게 명확히 제시해 혼란을 잠재우고 총력을 결집하게 한다.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여러 층위의 다양한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씨름하며 결단하는 행동지향형 실무 자세를 취하게 한다. 12·3 친위쿠데타 이후 한국 사회에도 위기의 리더십이 존재한다. 우익과 손잡거나 무작위하여 위기를 조장하지 않는다. 이들과 반대로 헌정 질서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갈등 국면으로 치닫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함으로써 이중권력 상태를 만든 집단리더십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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