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비법] 부정경쟁법 판결 본격화…계약 미끼로 기술 편취하면 처벌

2025-03-31

[비즈한국] 기업들은 때론 돈만 가지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결정을 한다. 그 속에 숨어 있는 법이나 제도를 알면 더욱 자세한 내막을 이해할 수 있다. ‘알아두면 쓸모 있는 비즈니스 법률(알쓸비법)’은 비즈니스 흐름의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주어진 일을 신속하게, 고품질로 완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본인이 직접 다 하지 않고 남이 한 것을 가져오는 것이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분명히 시간과 자원이 부족했을 텐데 놀라울 정도로 빨리, 그것도 좋은 품질로 업무를 해내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대단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 해놓은 일을 취합·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아서 허탈한 기분이 든 적이 있다.

여러 사람에게 일을 배분하고, 일정을 관리하며, 결과물을 취합·정리하는 것도 능력이니 이러한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도 ‘일잘러’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뒷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남이 한 일을 가로챘다”거나 “다른 사람의 노력을 숨기고 본인이 다 한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라는 평가다.

이러한 사태는 직장이나 부서 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거래나 계약을 미끼로 정보를 요청하는 상황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발주자가 후보자에게 입찰 참여를 권유하면서 제안서 등의 형식으로 자료 제공을 요청하고, 컨소시엄 주간사가 서브사 후보에게 기술 자료 제공을 요청한다. 이 과정에서 발주자 등은 제공 받은 자료를 사업에 요긴하게 사용하지만, 후보자에게는 ‘입찰에서 탈락했다’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했다’는 이유로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는다.

이는 변호사 업계에서도 은근히 자주 발생한다. 예를 들어, 자문사 선정에 필요하다며 여러 법무법인으로부터 상세한 내용의 수임 제안서를 요청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취합된 수임 제안서의 내용을 활용해 법적 분쟁에 대응한다. 이때 작성자의 동의 없이 자문사에 다른 법인의 수임 제안서를 공유하는 문제가 생긴다.

사실 이 정도는 약과다. 여러 곳에서 수임 제안서만 잔뜩 받고 자문사 선정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발주자는 “계획이 갑자기 취소됐다”는 둥 변명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정보 수집을 위해 ‘낚시’를 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이러한 행위는 상식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비난의 대상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법적인 책임을 묻기 쉬울 것 같지만, 놀랍게도 꽤 최근까지 이에 대해 법적 조치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정보 제공이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차원이고, 아직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으므로 계약 책임을 주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부정경쟁법이 개정되고, 법원이 이를 적극적으로 적용해 판결을 선고한 사례가 등장했다. 하도급법 영역에서도 공정위가 기술 자료 유용을 제재한 사례가 등장하는 등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부정경쟁방지법 제1조 차목 본문은 ‘사업 제안, 입찰 공모 등 거래 교섭 또는 거래 과정에서 경제적 가치를 가지는 타인의 기술적 또는 영업상의 아이디어가 포함된 정보를 그 제공 목적에 위반해 자신 또는 제삼자의 영업상 이익을 위해 부정하게 사용하거나 타인에게 제공해 사용하게 하는 행위’를 부정경쟁행위로 규정하고 있다(이하 ‘아이디어 탈취 행위’라고 칭한다). 다만, 위 단서에 따르면 ‘아이디어를 제공받은 자가 제공받을 당시 이미 그 아이디어를 알고 있었거나 그 아이디어가 동종업계에서 널리 알려진 경우’는 부정경쟁행위에서 제외된다.

기존의 제도와 비교할 때 위 조항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첫째, 아이디어 탈취 행위는 그간 오랫동안 논의됐으나 법적으로 보호받는 데 미흡하다고 여겨진 ‘아이디어’를 보호하는 조항이다.

저작권법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표현된 ‘형식’을 보호하는 법률이다. 그래서 콘셉트 및 스타일 모방으로는 저작권 침해를 인정받기 어렵다. 특허법은 특허청 등록이 완료된 특허권을 보호하는 법률이므로, 특허권 등록을 완료하지 않았다면 애당초 기댈 것이 못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 조항은 보호의 대상을 아이디어까지 넓혔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 위 조항은 ‘계약을 체결하기 전’ 아이디어를 제공한 경우에도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약을 체결하기 전이라면 원칙적으로 계약에 의해 보호받기 어렵다. 예외적으로 ‘계약 체결상의 과실책임’이라며 계약 체결 전 단계에 발생한 일에 대해 보호받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나, 요건이 까다롭고 보호 범위도 좁다. 그러나 위 조항은 거래 교섭 또는 거래 과정에서 이루어진 정보제공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계약 체결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거래관계에서 보호를 받을 수 있다.

2018년 위 조항이 도입된 이후 이를 적용한 법원의 선고도 나오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2019나2031649 판결은 치킨 프랜차이즈 회사가 광고 용역 회사에 제품 네이밍 등을 의뢰했다가 기간만료 등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계약 종료를 통보한 후, 광고 용역 회사의 광고물을 사용한 사안에서 아이디어 탈취 행위를 인정했다. 해당 판결에서 법원은 치킨 프랜차이즈 회사에 광고물 폐기 및 손해배상을 명령했다.

2022년 개정된 하도급법은 제12조의 3을 신설해 원사업자는 정당한 사유를 입증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수급 사업자에게 기술 자료를 요구할 수 없다고 명시했다. 기술 자료를 제공받는 경우에도 사전에 기술자료 요구서를 주고 비밀 유지 계약을 맺을 것을 규정했다.

위 조항은 이른바 ‘기술 자료 유용 행위 금지조항’으로 하도급 거래에만 적용된다. 하지만 원사업자는 하도급 거래를 종료한 후에도 위 조항에 따라 수급 사업자의 기술 자료를 유용할 수 없는 의무가 생기므로 기술 자료의 보호 기간과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대기업이 품질 확보 명목으로 부품 협력사로부터 제조 공정도, 작업 표준서를 받은 후 이를 다른 협력사에 제공하고 부품 양산을 지시했다면, 이는 전형적인 기술 자료 유용(침해) 행위에 해당한다. 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조항이 생기더라도 서브사가 주간사에게, 협력사가 원청에 자료 유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래서 지금도 아이디어 탈취 행위, 기술자료 유용 행위는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간과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조항을 도입하면 그 조항을 적용한 사건은 계속 발생하게 되고, 만에 하나 조사·재판 등을 진행하는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은 가볍지 않다. 따라서 정보를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책임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절차를 준수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정보 보유자(제공자)가 받아야 할 마땅한 몫을 인정하는 태도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writer@bizhank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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