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의료를 살리려면 동네의원에서 종합병원, 상급종합병원으로 고착화된 의료전달체계를 깨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2·3차로 분절된 의료기관 모델의 재정립 없이는 이른바 ‘빅5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으로 불리는 대형 상급종합병원 쏠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은철 연세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보건정책 및 관리연구소장)는 26일 대한병원협회가 국회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이수진, 김남희, 김윤, 서미화, 장종태 의원실과 공동으로 개최한 ‘바람직한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위한 정책 포럼’에서 "미국, 영국 등 해외 선진국에서 지역 기반 건강관리 체계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동안 한국은 30년 전에 만들어진 의료전달체계를 붙들고 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수도권 대형병원 쏠림 현상은 의료계에서 고질적으로 지적돼 온 문제다. 2024년 기준 서울 의료기관 이용자의 41%는 타 지역 거주자로, 2014년 35.6%보다 6%P 가까이 올랐다. 정부가 지난 20여년간 수도권 쏠림을 완화하고 의료전달체계를 바로 잡겠다며 수많은 정책들을 쏟아냈지만 지역 간 격차는 갈수록 심화하는 추세다. 2023년 기준 지역 내 의료이용률을 보면 서울 90%, 충남 66%, 경북 64%, 세종 55%로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의료 접근성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상급종합병원 진료가 불필요한 경증 환자까지 몰리면서 사회적 비용 지출이 중증하고 정작 중증 및 응급 환자가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악순환으로 치닫고 있다.

박 교수는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 시행 이후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반복됐지만 실패한 이유에 대해 "수도권 병원 이용을 억제하는 데만 정책의 기조가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동네의원 등 1·2차 의료기관은 경증 환자를, 3차 의료기관은 중증 환자를 담당하는 등 종별 구분이 병원의 수준을 가늠하는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본인 부담을 올리고 진료의뢰서를 제한하는 식의 정책적 접근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이미 의료 선진국들은 1차→2차→3차 의료기관으로 이어지는 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변화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일례로 영국은 일반의(GP)와 약사, 사회복지사, 요양복지사 등이 팀을 꾸려 3만~5만 명 규모의 인구집단을 관리하고, 이후 2·3차 의료기관을 통합한 지역 기반 네트워크 등으로 통합 관리하는 2단계 체계를 갖췄다. 미국도 주치의 주도 하에 간호사, 약사, 사회복지사, 사례관리자 등이 참여하는 팀 기반 수평적 통합 모델과 함께 오바마 정부 시절 도입한 책임의료조직(ACO) 등 수직적 통합 모델로 재편되고 있다.
박 교수는 "주치의 경험이 없는 한국에서 영국·미국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면 오히려 혼란을 키울 것"이라며 "지방병원과 소형 의료기관의 역량을 강화해 환자들의 낮은 선호도를 바로 잡고, 한국의 실정을 파악하는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불변의 진리로 인식돼 왔던 1차→2차→3차 의료기관으로 연계되는 의료전달체계를 과감하게 탈피해야 한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로 인해 의료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현재의 의료전달체계가 더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다. 의료전달체계 재편을 위한 다양한 제안들도 이어졌다. 박진식 대한병원협회 제2정책위원장(세종병원 이사장)은 "그간 의료전달체계 논의에서 3차병원과 1차의료 지원 사업은 있었지만 지역완결형 의료의 핵심인 2차 의료기관은 대부분의 정책에서 소외됐다"며 "장거리 이동이 힘든 고령자를 위해서라도 지역 2차병원 육성과 지원 규모 확대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김충기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는 "1·2차 의료기관이 '경증 진료 중심'이라는 제한적 역할에 머물러 있는 데서 구조적 문제가 비롯됐다"며 "전문질환군의 지속 관리와 복합질환 포괄 진료까지 포함하는 '고급형 일차의료'로 확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자의 선택권과 이동의 자유가 효율성보다 상위의 가치인 만큼, 정보 공개를 통해 환자 스스로 적정 의료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권용진 서울의대 교수는 "의료법인의 상업성 강화를 방치한 채 전달체계만 손보는 방식은 지속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며 "환자의 선택권을 더욱 강하게 보장하고 장기적으로는 의료법인을 민법상 비영리법인으로 전환해 소유구조와 이익배분, 공공성 기준을 재정립할 때 비로소 전달체계 개편이 실효성을 가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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