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고무신을 신은 판사' 김홍섭이 그립다

2025-03-24

정치 권력의 압력 받자 검사직 때려 치고 돼지 키워

도시락 싸들고 고무신 신고 출퇴근 한 대법원 판사

'사형수의 아버지', '사도법관'으로 불린 시대의 정신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사법부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몰려 있다. 지금 국민은 판사들이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런 판결을 위해 오직 필요한 것은 '정의'다. 길지 않은 사법부의 역사 속에서 그런 '정의'를 실천하여 거의 유일하게 존경받는 판사가 있다. 판사 김홍섭이다.

김홍섭(金洪燮, 1915~1965)은 청빈한 법관의 대명사였다. 타락하면 곧바로 '법비'나 '법꾸라지'가 되는 법조계에서 공정성을 지켰던 인물이었다. 신념에 입각한 판결을 하면서도 풍류를 아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도법관' 혹은 '고무신을 신은 판사'라고 불렀다.

전라북도 김제 출생.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전주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1939년 일본대학(日本大學)에 입학하여 2년 만에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귀국 후 김병로(金炳魯)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활약하다가 광복이 되자 서울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담당하여 명성을 떨쳤지만, 그해 9월 검사직에 대한 회의를 느껴 사임했다. 그 뒤 당시의 대법원장이던 김병로의 간청으로 법조계에 복귀, 서울지방법원 판사·고등법원 판사·지방법원장·대법원 판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아직도 회자(膾炙)되는 것은 청렴강직했던 삶에 있다. 그는 평생 부인이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양복은 한 번도 맞춰 입은 적이 없었다. 구두도 한 번 안 신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슬하에 8남매를 두고 가장으로서 짐이 무거웠지만, 어떤 청탁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의 청렴한 삶을 둘러싼 일화는 넘쳐난다. 검사였던 그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맡아 양심에 따라 수사권을 지휘하고자 했지만,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심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검사직을 내던지고 한강변 뚝섬에서 닭과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도 했다.

김홍섭은 한국 전쟁 직후 서울로 환도한 뒤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그는 끊어진 한강 다리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한 시민들이 부역자로 몰리고, 이웃집 장독에서 간장을 가져다 먹다가 잡혔다고 특수절도죄로 재판정에 선 이들을 앞에 두고 자책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재판할 수 있는가. 국민을 이 같은 처지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본인도 가족들을 돌보기 힘든 상황에서도 박봉을 쪼개서 그들을 돕기도 했다.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김홍섭 판사는 스스로 사형수의 대부를 자처하여 틈날 때마다 구치소와 교도소를 오갔다. 1956년 1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을 암살한 허태영 대령은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김홍섭 판사의 인도로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김 판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평소 많은 독서와 사색을 즐겼던 김홍섭 판사의 수상집 '무상(無常)을 넘어서'는 아직까지도 읽히는 책이다. 그 책에 쓴 법에 대한 단상은 오늘에도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법을 예장처럼 차리고서 근엄·자중하는 사람.

법을 보신처세 도구로 삼아 변융자재로 구사하는 사람.

법을 장난감 딱총처럼 휘두르면서 때때로 세간을 놀래어 주는 사람.

법을 빨간 넥타이처럼 목에 달고서 장식에 이용하는 사람.

법을 양식 바가지처럼 꽁무니에 차고서 염치없이 쫓아다니는 사람.

법을 경이원지(敬而遠之)는 하지만 끊어 팽개칠 용기도 없어 질질 끌고 다니는 사람.

법을 사갈같이 엽기하는 사람.

법을 악마처럼 증오하는 사람.

이 책에는 그가 쓴 희곡도 수록돼 있다. 그는 '최대의 오판'이라는 희곡에서 인류 최대의 오심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지는 장면,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재판 장면, 창세기에 하와가 뱀의 꾐에 빠져 죄를 짓는 장면'이라고 기술했다.

1960년 대법원 판사로 발령받았던 김홍섭은 5.16 쿠데타를 비판하다가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 1964년 광주고등법원장에서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간암 진단을 받고 이듬해 3월 16일에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눈을 감았다. 그는 평생 '사랑과 청빈의 삶' 그 자체를 몸소 실천했다.

여담이지만, 김홍섭 판사의 장남인 김정훈은 사제의 길을 걷고자 가톨릭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사제가 되기 직전인 1977년 그곳에서 불의의 등반사고로 불과 30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발간된 유고집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를 읽다 보면 김 판사의 장남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산과 사람을 사랑하고, 겸손하고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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